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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선생님 Oct 15. 2024

그 한마디면 되는데.

아이들에게 배우는 지혜 1.

> 사랑하는 나에게 <

' 싫은데 싫음을 참고 좋은 말과 행동을 한다는 게 어른인 나에게도 어려운 일임을 잘 인정했어. 덕분에 아이들에게 빨리 서로 사과하라고 채근하지 않고 잘 기다려줄 수 있었잖아? 용기와 기다림을 아이들에게 계속 보여주는 어른이 될 수 있기를. 오늘도 지혜롭게 잘 해냈다! '



  둘이 붙으면 늘 싸우는 학생들이 있다. 서로의 곁을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싸움은 발생한다. 바로 우리 반 정인이*와 구영이*의 이야기다. 학급에 30명이 있다 보니 아이들 책상만으로도 공간이 꽉 찬다. 교실 내에서 이동할 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친구의 책상을 치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 보통의 아이들은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고 친구와 마찰이 있어도 사소한 문제라 여기며 넘어간다. 하지만 정인이와 구영이는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 


  오늘도 둘은 서로에게 심하게 으르렁거렸다. 벌어진 상황은 달라도 둘의 요구사항은 늘 한결같다. 구영이는 정인이가 자신에게 좀 더 따뜻하게 말해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정인이가 눈을 흘끼고 삿대질을 하며 ' 왜 치고 가! 기분 나쁘게 '라고 소리치기 때문이다. 정인이는 구영이에게 자신의 물건, 자신의 자리, 자신의 몸 근처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고 자기 일에 간섭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앞으로도 신경 쓰이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에게 말한다. ' 선생님은 싫어하는 사람에게 따뜻하게 말할 수 있어요? 싫어하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라고 저에게 강요하지 마세요. '


  나는 그나마 대화가 통할 것 같은 구영이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 구영아, 구영이 몸이 책상에 부딪힐 때 정인이가 불편함을 겪었나 봐. 앞으로는 치고 가지 않게 더 조심할게라고 먼저 말을 건네볼까? ' 구영이는 마음이 아프지 않은 밝고 건강한 친구지만 자존심이 센 친구다. 입을 꾹 다문다. 이렇게 오늘도 둘은 10분. 11분. 12분.... 쉬는 시간이 끝나고 수업시간이 시작되었는데도 내 옆에서 서로를 째려보며 한참을 서있었다. 수업시간이 되었으니 일단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라 했다. 하지만 둘은 꿈쩍을 안 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리로 들어가면 상대방에게 지는 싸움이 되는 것 마냥.


  만약에 정인이가 마음이 아프지 않은 친구였다면, 좀 더 다르게 생활지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둘의 싸움은 늘 정인이의 자기중심적인 사고 때문에 발생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정인이에게 단호하게 대했다. 그 결과 정인이는 나에게 친절함을 강요하지 말라며 소리를 지르며 나에게 화를 낸다. 하루종일 정인이를 따라다니며 주변 친구들의 모습을 통해 넘어갈 수 있는 문제 상황과 친구들을 대할 때 필요한 말투와 행동을 시각적으로 가르쳐보기도 했다. 정인이는 내 가르침을 자기 관점으로 해석하며 자기가 실천할 수 없는 이유를 내게 설명했다. 다행히 정인이에게도 친절함을 실천할 수 있는 예외의 상황이 있었다. 자신과 친한 친구에게는 친절하게 대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자신의 기분대로 대해도 된다는 게 정인이의 확고한 신념이다. 


  인내심을 발휘해 보고 더 나은 지도 방법을 떠올려보려 애썼지만 매일 반복되는 둘의 싸움에 나 역시 진절머리가 나버렸다. ' 계속 이렇게 서 있기만 할 거야? 당장 자리로 들어가! '라고 화를 내고 싶었다. 그때 다 마신 우유곽을 제출하러 앞으로 나오던 예찬*이가 한 마디를 했다. '미안해, 그 한 마디면 되는데.' 예찬이가 그냥 혼잣말로 흘리듯 말했지만 내 귀에는 '그 한 마디'라는 단어가 크게 들렸다. 


  " 그래! 그 한 마디면 되는데. 딱 한마디 말만 서로에게 건네면 이 얼어붙은 싸움이 종료되는데 그 한 마디를 안 해서 계속 이렇게 서 있다니! 예찬이 말대로 한 마디면 돼. 딱 한 마디. 누가 먼저 한 마디를 건네볼까?" 나는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흥분하여 크게 말해버렸다. 그러자 수업을 기다리며 앉아있던 아이들도 '그래, 딱 한 마디! 한 마디!' 내 말을 따라 하더니 구호처럼 외치기 시작했다. 다 함께 '한 마디! 한 마디!' 구호를 외치는 재미있는 상황에 교실은 웃음이 터져버렸고 흰 눈을 보이던 정인이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구영이 역시 멋쩍은 웃음이 얼굴에 번졌다. 반아이들 덕분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지만 두 사람의 자존심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결국 둘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웃음으로 때우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진전은 있었다. 아이들은 한 마디라도 말해보는 노력을 다음에는 꼭 해보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긴 자존심 싸움 끝에 맺어진 이 약속이 참 좋다. 선생님께 혼나기 싫어서 사과하는 말을 대충 건네는 대신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말로 실천할 수 있는 약속을 정했기 때문이다. 아마 정인이와 구영이는 내일도 싸울 것이다. 하지만 한 마디가 서로에게 전해지고, 그다음 날에는 두 마디를 서로 나누고. 이렇게 둘은 함께 한 마디를 건넬 줄 아는 노력을 키워나갈 것이다. 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나도 부끄럽지 않도록 힘겨운 한 마디를 오늘밤에는 꼭 건네봐야지. 우리 신랑에게... ^^


*가명 1 *가명 2 *가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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