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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당Sadang Sep 14. 2020

[D+1] 어머니는 '네 탓'이라고 말씀하셨다

삶을 바꾸기 위해 던져야 하는 질문은 'Why'가 아닌 'How'이다

<저는 이대로도 괜찮지가 않아서요>는 '무스펙 흙수저 대학 중퇴자', '막장 인생'인 글쓴이가 자기계발서의 방법론을 실제 삶에 적용해 얻은 변화를 진솔하게 기록하는 '자기계발 일기'입니다. 참고한 자기계발서나 기타 인용문의 출처는 해당 연재분에 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삽입된 사진의 경우 특별히 출처 표시가 없다면 전부 글쓴이가 직접 촬영한 사진입니다. 글쓴이의 사연이 궁금하신 분들은 프롤로그(https://brunch.co.kr/@ssun0308/3)를 참고해 주시고, 즐겁게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이 글은 2020년 9월 11일에 작성 완료되었고, 2020년 9월 14일 브런치 작가 승인 처리 후 업로드하였습니다. 읽으시는 데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내 나이쯤 되면 뭘 결심해도 "며칠 저러다 말겠지"라는 시선만 받는다. 특히 나는 '오늘부터 새 사람이 되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잘 떠벌리고 다니는 편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가족, 친구, 지인들은 아무리 조언해도 바뀌지 않는 나에게 지쳐 나가떨어졌고, 그중 몇몇은 "내가 장담하는데 김사당은 절대 안 바뀐다, 평생 저렇게 살 거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문제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마음마저 그들처럼 냉소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나를 바꾸고 싶은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 내 발버둥은 실패하거나 반짝 성공에 그쳤다. 그렇게 쓰레기통 같은 어두운 고시텔에 누워 휴대폰을 보는 나로 되돌아오는 것을 최소 십여 번 이상 겪고 나면, 우울증 환자가 아닌 조증 환자라도 자신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말 무의미한 계획표였다. 다만 무의미하게 보낸 날들도 어떻게 보냈는지 기록해 두었다는 것이 에세이를 연재할 때는 큰 장점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관성적으로 계획표를 짜고 있었다. 변화와 성장, 하다못해 계획 성취가 목표가 아니라, 그냥 그거라도 안 하면 허전하니까, 그리고 기적처럼 다음날 내 뇌세포가 다 바뀌어 저절로 새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짰다. 나는 문제 학급을 담당하는 무기력한 교사처럼 나 자신을 대했다. 그들은 수업 시간을 채워 교과서대로 진도를 나가기는 하지만, 학생들이 배우든 말든 관심도 없고 학생들을 배우게 할 생각도 없다. 나도 나 자신에게 관심도 기대도 없었다.


기적처럼 내 뇌세포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당연히 실망스러운 하루들이 반복되었다(심지어 이 연재글의 프롤로그를 쓴 이후에도 2주 가까이 그랬다). 그런데도 별 생각이 없었다.


나는 평생 이렇게 살 것 같았다. 죽을 용기가 없고 몸뚱아리는 쓸데없이 건강하니, 80살 할머니가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서 "언제부턴가 내 인생이 꼬여서……." 타령만 할 것 같았다.



여든 살 할머니가 된 내가 어느 낡은 방 안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그때 대학교에 재입학하고 싶었어'라고 말하는 상상을 했다.




그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저런 추한 노인이 될 생각을 하니 끔찍했고, 지금 내가 얼마나 젊은지 깨달았다.


사실 최근 어머니와 크게 싸웠었다. 듣기 좋은 말은 인생에 하등 도움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어머니와 채찍보다 격려가 필요한 나는 상극 수준으로 안 맞는다. 요즘 MBTI가 유행하니 어머니는 사고형, 나는 감정형이라고 설명하면 대부분 이해할 것이다. (다만 내 MBTI는 실제로 INFP이지만, 어머니는 MBTI 검사를 받으신 적이 없다.)


어머니는 "네가 만 4년을 서울에서 보내고도 대학 졸업장을 받지 못한 것은 온전히 네 탓"이라고 하셨다. 없는 형편에 생활비도 많이 대줬는데(사실이긴 하다) 누굴 원망하느냐고도 하셨다.


나는 '네 탓'이라는 말에 거의 눈이 뒤집힐 뻔했다. 죽지 못해 살아가며 가장 괴로웠던 사람은 나인데, '네가 잘못했으니까 그 꼴이 되었지'라는 평가는 무덤에 생매장당한 나를 꺼내 난도질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다못해 말이라도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을 원했다.


하지만 감정을 추스리고 생각해 보니, 어머니의 '네 탓'이라는 말이 사실은 내게 더 필요했음을 깨달았다.





나름대로 내 생각을 오해 없이 표현하기 위해 그림을 그려 보았지만, 내 그림 실력으로는 없던 오해도 생길 것 같다(...)






세상에 노력과 의지만으로 이루어지는 성취는 하나도 없다. 환경과 행운이라는 팩터는 명백히 존재하며, 그것이 개인의 노력과 의지보다 어쩌면 수백 배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환경이 노력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이 '환경이 노력과 상관없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와는 전혀 동일한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원래는 '대치동 의사 아들 A와 달동네 삼남매 장녀 B'의 예시를 꽤 장황하게 들어 놨는데, 일단 이 글이 '자기계발서'가 아닌 '자기계발 수기'이기 때문에 예시는 삭제했다. 대신 부끄러운 나의 과거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평생 굴곡 없이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밥을 굶은 건 아닌데, 맛있는 반찬은 많이 못 먹었다. 그럼에도 EBS 교재를 달달 외워서 소위 '명문대'에 입학하긴 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대학교에 오니 고등학교 때까지는 암시적이었던 빈부 격차가 명백해졌다. 나는 원룸 보증금이 없어 고시텔에 살면서 1년에 옷 한 벌도 제대로 못 사는데, 그래도 어머니께 생활비를 다 지원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고시텔이 어떠한 공간인지 보여 드리고 싶었지만, 제대로 된 사진이 없었다. 어차피 고시텔을 너무 더럽게 썼기에 제대로 된 고시텔 전경 사진도 공개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고시텔에서 살고, 카페에서 가장 싼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시키는 건 사실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난 개인적으로 고시텔이 좋았다. 그런데 빈부격차는 스펙 격차로 이어졌다. 나는 새내기 때부터 1년 반 동안 경영학회에서 활동했는데, 아르바이트 시간이 너무 많아서 학회 활동에 지장이 갈 정도였다. 내가 공인영어성적이 없는 이유도, 실력 확인용으로 시험을 쳐 보기에는 원서접수료가 너무 비싸서 한 번에 고득점을 받으려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한때 사회학자를 꿈꿀 만큼 사회 구조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태생부터 '노오력론'과 좀 안 맞긴 했다. 크고 작은 일들을 보고 겪으면서, 나는 점점 '대기업 갈 스펙도 돈이 없으면 못 만드는구나, 나는 경쟁에서 밀리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확신이 되는 순간 나는 모든 것을 놓아 버렸다. 학점을 챙기지 않았고, 휴학을 밥 먹듯이 했고,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을 전부 술과 모바일 게임 뽑기에 써 버렸다.


그리고 타의로 복학을 포기해야 할 지경이 되어서야, 나와 가정형편이 비슷한 친구들 대부분이 자기가 아르바이트와 병행할 수 있는 활동을 찾아 스펙을 잘 쌓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부자들과 동일한 방법으로 스펙을 쌓을 수 없다는 사실에만 집착했는데,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 부자들과 다르기 때문에 같은 전략을 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른 전략을 찾았다.


그 친구들은 취업을 했다. 나는…… 프롤로그에 다 나와 있는 내용을 두 번 쓰진 않겠다.


나는 스무 살 3월 2일의 나에게 딱 한 마디만 할 수 있다면, 고민 없이 '네가 부유한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못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라'고 말하고 싶다. 고집과 자의식이 강한 과거의 내가 이 조언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천만 분의 1 확률로 과거의 내가 고집을 꺾었다면 이후의 삶은 정말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결국 주어진 환경 속에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떤 전략을 취할 것인가의 문제이고, 이 고민은 '금수저'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평생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노력 만능론과는 다르다.



이제야 나는 왜 어머니가 '네 탓'이라고 말씀하셨는지,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그렇게 개념없이 굴지도 않았는데 왜 내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저으며 나를 떠났는지 알 것 같다.


나는 오로지 ' 나는 가난한 집에서 온갖 결함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 이렇게 불행하게 살고 있을까'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가난한 집에서 온갖 결함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서 행복을 쟁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였다. 어머니는 '지금껏 네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잘못된 전략을 세웠기 때문이며, 앞으로 행복해지려면 다른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것은 남이 해 줄 수 없는 일이다'고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어머니는 꽤나 지혜로운 분이기에, 자식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감정적으로 비난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다만 빈부 격차가 개인의 미래 구상에도 영향을 주는 건 솔직히 맞다. 나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처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불평등한 환경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 주길 바란다.



내가 가져야 하는 의문은 Why가 아닌 How였다.




그런데 나는 현재 처한 환경이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단점도 몹시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우울증이라는 병은 그렇게 쉽게 극복되는 병이 아니다. 로또 1등에 당첨되지 않는 이상 내가 행복해진다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든 나라는 인간에게 변화가 온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스물다섯 살이나 먹은 성인이 성격을 바꾸거나 능력을 게발하는 것이 가능하긴 할까?


나는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완벽한 공부법> <마인드셋>을 읽으며 보았다.






오늘(20년 9월 14일) 브런치 작가 승인이 되어 내 글을 공개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미 완성해서 저장해 둔 글 두 편을 약간 고쳐 업로드했을 뿐 새로 글은 쓰지 않았다. 혹시나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이 있다면 죄송하지만, 몇 주간 새 연재글은 없을 것 같다(연재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며칠 전 게임하며 알게 된 지인이 지방공기업 채용 정보를 전해 주었다. 학위나 자격 제한 조건이 없어서 내게는 천헤의 기회였다. 글 쓰는 일은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즐겁지만, 전업 작가의 길은 최소한 빚이 없어진 후에 고려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원서를 냈고, 지금은 이 에세이 연재를 포함해 온갖 하고 싶은 일들을 참아가며 경영학 문제집을 외우고 있다.


필기시험을 친 후에는 다시 글을 쓸 생각이지만, 현재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시험 일정이 무기한 연기된 상황이라서 '언제 돌아온다'라고 확언은 드리기 어렵다.


자기계발은 계속하고 있다. 다만 지금은 저 하늘에 계신 분이 내가 정의로운 납골당 매점 관리원이 되는 것을 허락하시길 바랄 뿐이다.




<저는 이대로도 괜찮지가 않아서요> 새 연재분 포스팅 일자는 별도의 공지를 통해 안내드리겠습니다. 부족한 사람의 부족한 글을 읽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코로나19 시국에 일교차도 심해지고 있습니다. 모두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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