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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재 Nov 25. 2024

글쓰기는 오지선다가 아니니까

'잘 쓰기'보다 귀한 '그냥 쓰기'

나 지금 제대로 쓰고 있는 걸까.
글 흐름이 이게 맞나.


내가 쓴 글인데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험 망치고 온 내 아이를 바라보는 것처럼. 초고를 완성하고 뿌듯했는데 금세 풀이 죽는다. 그래서 은유, 장강명, 정아은, 정지우, 이주윤, 이은경 작가의 책을 편다. 빨간색 인덱스로 표시해 둔 부분을 펼쳐 읽는다. 표시해 둔  부분은 '글은 누가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그 유명하고 대단하고 멋진 작가들은 이야기한다.


그냥 써라. 제발 잘 쓰려고 하지 마라.
글은 누구나 쓰는 거다.   


글쓰기란 무엇인가. 사전에 따르면 글쓰기란 '생각이나 사실 따위를 글로 써서 표현하는 일'을 일컫는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 어떤 사람이나 일 따위에 대한 기억,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거나 관심을 가짐을 의미한다. 사실은 무엇인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한 일을 솔직하게 말할 때 쓰는 말이며 한자에 따라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 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글쓰기는 판단과 기억, 마음에 대해서 혹은 있었던 일에 대해서 언어로 기록하는 일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언뜻 보면 당연하기 짝이 없는 이 일이 왜 이리 어려운가. 생각과 사실을 설명하는 일에 '마음'이 담기기 때문은 아닐까.  


언어는 명료하다. 사전을 찾아보면 아주 선명하고 똑똑하게 정의되어 있다. 언어에는 '자의성'이 있다. 한 단어가 그 뜻을 갖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결과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붉거나 푸른 색깔을 띤 둥근 모양의 먹을 수 있는 열매. 전체적으로 둥근 모양이며 위아래 배꼽처럼 옴폭 파여있고 위쪽에는 나무와 연결되어 있던 꼭지가 달려있음. 달콤하고 새콤하기도 하며 종류에 따라 시원하게 아삭하거나 다소 푸석거리는 식감을 지니기도 한' 것이 '사과'라는 이름을 가진 건 우연이다. 누군가가 시작한 그 우연은 그 사람을 둘러싼 공동체에서 점차 퍼져나가면서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게 되었을 테다.


마음은 분명하지 않다. 마음은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감정이나 의지, 생각 따위를 느끼거나 일으키는 작용이나 태도'라고 정의된다. 에세이를 쓰든 정보 전달 글을 쓰든 우리는 쓰는 순간 마음과 만나게 된다. 모호하고 안개 같은 마음을 선명하고 잘 보이는 언어로 담아내는 일이 글쓰기이니 글쓰기는 태생부터 쉽지 않은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문득 이 글의 첫머리에 있는 내 질문에서 눈에 걸리는 단어를 찾았다.  '제대로' '맞는' 표현이라는 게 글쓰기에서 가능한가. 이 두 단어 모두 정답이 있을 거라는 가정 아래 존재할 수 있다. '제대로' 쓰려면 표준이 있어야 한다. '맞는' 글을 쓰려면 정답이 있어야 한다. 글쓰기는 오지선다가 아니다. 수십 년간 문제집 채점과 모의고사, 내신 시험, 취업 시험에 길들여져 나다운 글쓰기를 권장받지 못한 자의 사회적 DNA가 이렇게  나타나는 것인가.


그냥 쓰자.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 쓰레기도 어느 정도 모여야 자원순환이 가능한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있다. 만일 A4 100장의 초고를 썼다면 박수를 보내자. 그리고 그다음은? 또 쓰는 거다. 새로운 글은 그냥 쓰는 거고 '초고'라고 불리는 글은 계속 다듬는 거다. 야마구치 다쿠로는 <결국 글은 쓰는 것이 아니라 다듬는 것입니다>에서 '쓸 때는 열정적으로, 고칠 때는 과감하게, 다듬을 때는 섬세하게'라는 아름다운 3단계를 제시하고 있다. 


일단 처음 글을 쓸 때는 장작을 모아 잘 쌓아야 한다. 그러려면 젖은 장작은 따로 보관하고 잘 마른 땔감들을 고를 줄 알아야 한다. 이들은 곧 크고 작은 글감들이다. 평소 읽지 않고 생각하는 힘이 약해 사막같은 내면의 상태에서 땔감을 찾는다면 꾸준한 읽기와 생각을 통해 작은 풀꽃부터 자라게 해야 한다. 땔감을 어느 정도 모았다면 마른 풀들을 사이사이에 잘 꽂아야 한다. 쓰고 싶다는 마음의 부싯돌이 계속 부딪히다 보면, 불꽃이 일으나 장작더미에 닿는 순간이 온다. 바로 그 때, 생각은 문자를 입고 종이 위에 피어오른다. 이 때 부싯돌의 색이 마음에 안 들어, 크기가 너무 작아, 불꽃이 신비하지 않아 투덜거려봐야 소용없다. 스스로 열정에 찬물을 끼얹을 뿐이다. 


고칠 때는 과감하게 고쳐야 한다. 작가에게 가장 빛나보이는 부분을 과감히 잘라내고 도려낼 수 있을 때, 비로소 글은 허물을 벗을 수 있다. 100여권의 대중 과학서적을 펴낸 최재천 교수님은 글을 쓴 후 결론을 뚝 잘라다고 서론에 가져다 둬보는 시간을 보내신다고 했다. 분명 기획과 조사에 의해 쓴 글인데도 전혀 다른 질감의 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나'와 '글'의 한계를 흔들기 위해 잘라내고 줄이고 다시 배치해보는 일은 아프고 힘들다. 그래서 함께 글 쓸 이들, 읽을 이들이 있어야 한다. 내 글의 장점을 찾아 떡잎을 피워낸 새싹 마냥 사랑하고 응원해 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일방적인 비난이나 난도질이 아니라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 '당신의 글에서 이런 점이 더해지면 어떨까요'라고 소통할 수 있는 존재들을 곁에 두어야 한다. 


다듬을 때는 섬세하게 살펴야 한다. '섬세'하다는 한자어로서 가늘 섬, 가늘 세 두 글자가 만난 단어이다. 가늘고 또 가늘게, 매우 찬찬하고 세밀함을 뜻하는 이 단어는 가늘고 찬란하며 단단한 거미줄, 또 다른 생명으로 거듭나기 위한 애벌레의 누에고치 실을 떠올리게 한다. 표현 도구들을 살펴보면 쉼표에서 접속사, 대화에서 직접 인용과 간접 인용에 따른 따옴표의 활용, 물음표와 느낌표 등이 딱 맞는 자리에 있는지 살펴야 한다. 말할 때 쓰지 않는 단어들이 자주 사용된 글은 잘 읽히지 않는다. 한자어로 된 어휘를 모른다며 문해력을 탓하기도 하지만, 그 전에 더 쉽고 친근한 단어를 쓰려는 노력도 중요하다. 문장에서는 주어와 서술어를 중심으로 호응, 위치, 어미의 반복 사용 지양 등이 중요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마지막으로 문장을 넘어 글 전체를 고치고 다듬는 단계까지 이를  수 있다. 


글쓰기에 정답은 없다. 완성은 없다. 다만 멈춤의 순간이 있을 뿐이다.


준비한 책을 투고하기 전 최소 40번 이상은  봤다. 모니터로, 인쇄해서, 소리내어 읽으며, 스프링 제본으로, 떡제본으로, 신국판 사이즈로. 그 때마다 고칠 곳이 보였다. 숨이 막혔다. 어느 편집자가 쓴 책쓰기 주제 도서에서 "출판사에서 당신 원고를 출간할 수 없다고 정중히 사과하는 건 당신 원고가 별로라는 소리다."라는 구절을 읽고 불안한 마음이 끝내 볼을 타고 내렸다.


내가 쓴 글이 그런 대접을 받을까봐 두려웠다. 나로 인해 내 아이의 노력과 시간이 하찮게 될까봐 무서웠다. 책을 내야만 우리의 시간이 가치로워지는 것은 아니나, 이미 세상에서 말하는 '책'의 외형과 힘을 알 만큼 성장한 아이의 기대와 설렘을 지켜주고 싶었다. 아이와 책을 내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엄마가 될까 불안했다. 우리의 경험으로 세상에 작은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시들까 초조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매번 새로운 나의 언어를 만났고 달라진 생각을 찾았기 때문이다. 생각은 단어를 부르고 단어는 문장을 낳으며 문장은 글로 몸을 이룬다. 나는 그 매일의 빚어냄이 고통스럽고 행복했다. 언젠가부터 읽기가 들숨이며 쓰기가 날숨인 시간을 보냈다. 모든 게 처음이라 갈 길을 모르는 나는 백지인 지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걷고 또 걸었다.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 나의 내면이라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  무엇이든 건져 올려볼 뿐이다. 빈 그물인 날이 훨씬 많겠지. 어쩌면 어느 날은 그물을 챙겨 바다로 나갈 엄두도 안 나겠지. 그렇지만 내가 하루라도 내 바다를 향해 나가지 않으면 그물은 서서히 삭아 끊어져버릴지도 모르지. 그러니 그런 날은 낚시라도 해보는 거다. 


이 새벽, 내 원고를 마주할 용기가 안 나서 나는 글쓰기라는 우주를 기꺼이 유영하는 다른 이들의 세계를 다녀왔다. 그리고 그냥 쓴다. 이 소중한 쓰레기는 나를 살게 한다. 내 두려움을 마주하게 하고,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이 일그러진 인정 욕구일 수도 있음을 알려주기에. 맞고 틀림이 중요한 것이 아니며,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글로 나 자신, 가족, 세상과 소통해보고 싶다는 소망의 씨앗을 다시 기억하도록 하기에 쓴다. 내 글은 온 우주를 통틀어 오로지 나만 쓸 수 있는 것. 그러니 오늘도 그냥 쓰자.  


오늘 새벽 이 글을 쓰고, 계획한 만큼 원고작업을 마칠 수 있었어요. 내일도 처음 보는 벽을 마주할 나를 위해 하루를 정리하며 발행합니다. 함께 쓰고 읽는 모든 작가님들, 감사합니다. 좋은 꿈 꾸세요 :)



글쓰기에 정답은 없다 마음에 정답이 없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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