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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우 Aug 24. 2020

말만 사는 도시 | 이진우


온 도시에 말이 가득하다

집집마다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

스피커와 전광판에서 미쳐 날뛰는 말

움켜쥔 손전화에서 잘 익은 고름처럼 터져 나오는 말

성난 파도처럼 갈기를 휘날리며

차선을 무시하고 달리는 말들은

강철 말발굽을 빛내며

아스팔트마저 녹인다

철학자와 시인으로 구성된 지하조직에서

이 말들의 배후와 진실을 밝혀냈다는 풍문이 있었지만

그들이 정보기관에 끌려갔다는 뉴스 뒤로

누구도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게 되면서

도시는 말의 존재를 잊었다

잊히면서 말은 두려움이 되었다

말에 대해 말하려는 자의 용기는 짓밟히고

뻔히 보이는 말에 눈감은 자의 비굴은

통장에 숫자로 찍혀 나왔다

말의 광란과 질주에 대한 뉴스도 없고

말똥 냄새가 난다는 민원도 없는

이 말 많은 침묵의 도시에선

자기 말에 책임지는 자가 사라졌다

아무렇게나 풀어놓은 수천만 마리

말을 잃은 자들의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눈을 감고 입을 다무는 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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