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시리즈: 시작하는 사람들 12
왓츠뉴는 이름 그대로 새로운 것들에 관한 콘텐츠입니다.
왓츠뉴의 인터뷰 시리즈 <시작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새로운 것에 첫 발을 내디딘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소개 부탁드립니다. 무엇을 새로 시작하고 계신가요?
저는 부산권 독립영화잡지 <섭씨 233>을 발간하고 있는 이우빈입니다. 씨네21에서 객원기자로 일하고 있고요. 동시에 대학교 졸업반이기도 합니다. 옛날부터 영화잡지를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어요. 이왕이면 패기 있고, 리스크가 적은 대학생 때 도전해보고 싶어서 시도해 보게 됐습니다. 크라우드펀딩과 부산 영화문화 네트워크의 제작지원으로 창간준비호를 발간했습니다. (1월 초 기준)
독립영화잡지를 만들고 계시군요. 잡지에 대해 조금 더 소개해주세요.
부산, 영화, 젊음,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만들었습니다. 부산권에서 새로 경력을 시작하는 영화인 분들, 영화 관련 문화를 기획하거나 영화에 대한 콘텐츠를 만들고 표현하는 분들에게 지면을 주고자 시작했어요.
지역 측면에서는 부산이라는 지역의 정체성을 담고 있고, 세대 측면에서도 기성 영화인들이 아닌 저희처럼 막 경력을 시작하는 분들의 글을 다룹니다. 제가 편집장으로 있고, 같은 학교 선후배 총 7명이 함께 만들고 있어요.
잡지의 정체성이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이라는 키워드와도 맞닿아 있네요.
부산하면 역시 부산국제영화제가 떠오르는데요. 영화와 가까운 도시기도 하죠?
맞아요. ‘영화의 도시’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단순히 행정적인 타이틀이 아니라는 걸 느껴요. 역사적으로 보면 항구도시다 보니 국내에 영화가 가장 일찍 들어온 곳으로 보기도 하고요. 최초의 영화 제작사도 부산에 있었거든요.
저에게 의미 있는 일화가 있는데요. 부산국제영화제를 처음 설립하신 분이 저희 부산대학교 선배이신 김지석 프로그래머입니다. 영화 동아리를 하시다가 경성대학교 영화 동아리와 연합 활동을 하면서 그 인연으로 국제 영화제를 만드신 거거든요. 그런 큰 영화제를 만들겠다는 포부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윗세대분들이 그랬던 것처럼 영화를 사랑하는 부산의 대학생으로 조금이라도 기여를 하고, 유의미한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를 다루기 위해 잡지라는 매체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확실히 잡지를 포함해 출판물 자체의 명성이 위축되었잖아요. 주변에서도 그런 말을 하거든요. 차라리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을 하는 게 낫지 않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효율적이고 현실적인 걸 좇는다면 그게 맞는 것 같은데, 만약에 제가 현실적인 걸 좋아하고, 당장 돈 벌기 쉬운 수단을 택하고자 했다면 영화를 공부하지도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단순히 제가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도, 사람을 인터뷰하고 만나는 것도 좋아하기 때문에 잡지가 된 것 같아요.
종이로 출판되는 잡지라는 점에서 물성이 가진 힘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잡지라는 게 그런 종이 매체의 특성을 가장 잘 살리는 매체라고 생각해요. 글도 중요하지만, 레이아웃도 중요하고 디자인과 사진이 합쳐져서 읽는 재미가 있어야 하니까. 제가 만드는 잡지가 제작 기간도 짧고 전문가도 아니라 어설픈 면이 있지만, 그래도 그런 잡지의 특성을 살리고자 열심히 하고 있어요. 사실 저는 신문도 종이로 봐요. 인터넷으로 보면 집중이 잘 안 되고, 중요한 현안이 뭔지 파악이 잘 안 되더라고요. 제가 고리타분한 건지. (웃음) 아날로그를 좋아합니다.
<섭씨 233>이라는 이름은 어떤 뜻을 담고 있나요?
영화 애호가들이 좋아하는 감독 중 한 명이 1950~60년대 프랑스 영화계를 이끌었던 프랑수아 트뤼포예요. 트뤼포가 만든 소설 원작의 <화씨 451>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특이한 건 국민들의 독서를 금지해요. 책을 보면 모두 태워버리고요. 소방관은 책을 소각하는 직업으로 변질돼요. 주인공인 몬태그는 소방관인데, 책을 너무 사랑하게 되는데요. 결국 범죄자로 도망치다가 숲에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하루 종일 책의 내용을 외우며 일종의 아카이빙을 해요.
트뤼포가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빗댄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저처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잡지라는 매체로 아카이빙하고 싶다는 의미에서 이 영화를 모티프로 이름을 지었어요. 그런데 화씨는 우리나라에서 잘 안 쓰는 단위잖아요. 섭씨로 변형해서 짓게 됐습니다.
종이책과 영화라는 키워드가 모두 맞물려있는 제목이기도 하네요.
표지는 ‘할리우드 갱스터’ 이미지를 표현했다고 하셨어요. 누구의 취향이 반영된 건가요?
사실 취향이라기보다 잡지 고유의 이미지를 가진 마스코트를 하나 만들고 싶었어요. 부산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니 고리타분하긴 하지만 당연히 갈매기가 떠오르더라고요. (웃음) 거기에 젊음, 발화를 뜻하는 불의 이미지와 영화의 이미지도 담고 싶었는데요. 팀원 중 한 명이 콜라주 기법을 제안했어요. 이 표지가 옛날 할리우드 영화배우인 험프리 보가트의 아주 유명한 프로필 사진을 쓴 거거든요. 성냥을 들고 있는 게 불과 젊음의 이미지도 드러나고, 영화와 연관된 이미지기도 하죠. 마스코트에는 ‘섭매기’라는 이름도 붙여줬어요. 앞으로 여러 버전으로 변용할 예정이에요.
다른 영화잡지와 <섭씨 233>은 어떤 점이 다를까요?
영화잡지에 대한 진입 장벽을 낮추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루는 사안과 독자의 범위를 최대한 늘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막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과 열정만 따지면 저희 같은 사람보다 클 수도 있는 거고요. 초기에는 비평지로 생각을 하다가, 비평을 축소하고 가벼운 감상이나 스태프로 일하는 사람들, 상영회 등의 문화를 기획하는 사람들, 영화라는 큰 체계를 유지해 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두 담고자 했어요.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에세이도 넣게 됐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게가 아예 가볍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 균형을 잡기 위해 많이 노력하셨을 것 같은데요.
아, 균형을 지킨다는 게 정말 어렵더라고요. 선배분들이나 선생님들께 조언을 많이 구했는데, 어떤 분들은 너무 가볍지 않냐, 또 어떤 분들은 너무 무겁지 않냐, 다들 의견이 다르더라고요. (웃음)
보통 창간호를 1호로 부르잖아요. 이번 펀딩에서 ‘0호’라고 이름 붙인 이유가 있나요?
사실 창간호가 아니라 창간준비호라고 했어요. 옛날 잡지나 신문에서 창간준비호라는 말을 쓰더라고요. 창간이라고 하면 월간지인지, 계간지인지 정해진 발행주기가 있어야 정식 창간이 되는 건데, 저희는 아직 추후 계획까지는 못 세운 상황이라. 이왕이면 1호보다는 0호라는 게 더 태초의 의미를 담지 않나 생각하고요. 개인적으로 움베르토 에코의 <제0호>에도 영향을 받았어요. 더 이야기해 보자면 애니메이션에 <에반게리온> 시리즈 있잖아요. 에반게리온이 큰 인간형 로봇 같은 건데, 첫 번째 로봇을 1호가 아닌 0호라고 부릅니다. (웃음) 아무래도 0호가 더 시작에 알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0호에 여러 문화적인 모티프가 들어와 있네요. 저도 0호가 더 시작에 알맞다는 데 설득됐어요.
영화 기자로도 일하고 계신다고 했죠. 학교를 다니면서, 기자로 일하면서, 영화잡지를 만들기까지 굉장히 바빴을 것 같은데요.
네, 사실 제 전공이 영화연출이라 (신문방송학과와 영화과를 복수전공했거든요) 제작 준비 중인 작품도 있거든요. 영화제에서 제작지원을 받아서. 아무래도 9월부터는 하루도 안 쉬고 업무를 쳐내야 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제가 선택한 것들이고,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니까 열심히 시간 안배를 해야겠죠.
제작 중인 영화에 관해서도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저는 연출자로서 정말 시작하는 단계예요. 정식으로 영화를 배급하거나 상영해 본 적 없는 말 그대로 영화학도인데요. 내년 부산국제단편영화제에 제작지원 선정을 받아서 2월 초에 영화를 찍습니다. 내용은 저장매체에 대한 거예요. 요즘 외장하드라든가, 노트북, 스마트폰에 많은 걸 저장하잖아요. 어쩌면 기억매체기도 하고. 거기에 경각심을 가져야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개인적으로 SD카드나 노트북이 고장 나기도 하고, 해킹을 당해서 클라우드에 올린 글과 사진을 모두 잃어버린 적도 있거든요. 그때 정말 큰 상실감을 느꼈고, 무서웠어요. 기억이 없어진 거잖아요.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한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워낙 다양한 일을 하시잖아요.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하시나요?
여러 개의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영화라는 정체성 하나는 확고한 것 같아요. 영화를 순수하게 좋아하기 때문에 영화에 얽힌 어떤 일이라도 하고 싶은 것 같고요.
언제부터 영화를 좋아하셨나요? 어떤 계기나 시작을 기억하시나요?
어릴 때 저희 친형이 애니메이션이나 컬트 영화, 좀비, 호러 영화를 되게 좋아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형과 그런 영화를 봤어요. 그 나이 때 보면 안 되는 것들인데. 자연스럽게 또래보다 일찍 취향이 생겼던 것 같아요.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딱 그 순간을 규명하는 건 어려운데요. 하나의 계기가 생각나긴 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 세 명과 동네 영화관에서 <프랭크>라는 영화를 봤거든요. 뮤지션이 되고 싶은데 재능이 없는 사람이 우연히 정신적으로 힘들지만 아주 재능 있는 뮤지션, 프랭크라는 사람을 만나게 돼요. 자신의 재능에 대한 회한을 느끼는 좀 슬픈 영화입니다. 저는 제 입장인 것 같기도 하고, 영화를 너무 재밌게 봤어요. 그런데 친구들은 ‘이게 대체 뭐 하는 영화냐’, ‘당구나 치러 갈걸’ 하더라고요. (웃음) 제가 남들보다 영화를 더 많이 좋아한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영화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는 걸 깨닫기 시작하셨군요.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영화사적으로 중요한 영화들을 챙겨봤던 것 같아요. 대학교 때는 다들 체육대회나 축제 갈 때 혼자 기숙사에서 영화 보고. 군대에서도 선후임들이 족구 하러 갈 때 혼자 생활관에 남아서 영화 보고. 휴가 나가서도 아카데미 기획전 보고 오고. (웃음) 자연스럽게 영화와 친해진 것 같습니다. 영화를 왜 좋아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명확하게 설명하고 싶어서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며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진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유가 불분명한 것 같아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선배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보통 씨네필이라고 하잖아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왜 좋은지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냥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라고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어요. 단언컨대 저는 글을 쓰거나 영화를 만드는 데 재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영화를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이 재능이라면 재능인 것 같아요. 끝없이 실패하고도 그걸 버틸 수 있는 마음, 원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재능이지 않을까.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을 원동력 삼아서 많이 시작하고, 많이 실패해 보셨군요. 기억나는 실패담이 있나요?
일주일에 한 번씩은 실패를 하는 것 같습니다. (웃음) 제가 올해 가장 목표로 삼았던 건 영화 평론으로 정식 등단을 하는 거였어요. 씨네21에서 하는 영화평론상도 있거든요. 올해 처음으로 도전했는데 최종심에서 떨어졌어요. 정말 딱 한 걸음을 못 간 것 같아서 정말 아쉬웠어요. 그러고 두 개 정도의 평론상에 도전했는데 모두 실패를 해서, 최근에 겪은 실패 중에 그게 가장 컸던 것 같아요. 영화를 만들 땐 제작지원 같은 데 시도를 많이 하는데요. 거기서도 많이 떨어졌고, 영화제에 출품한 것도 성과가 없더라고요. 실패는 끝없이 하는 것 같아요. 그걸 잊기 위해 또 끝없이 시도하고요.
새로운 일에 임할 때 유용한 우빈님만의 팁이 있을까요?
기한을 딱 정해놓는 거요. 그 안에 어떻게든 하자고 생각하고. 시간을 나에 맞추는 게 아니라, 시간에 나를 맞추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이번 펀딩도 기간이 정말 짧았거든요. 기한이 있으니 어떻게든 완성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덕분에 짧은 기간 안에 치열하게 많은 일을 이뤄온 것 같네요.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이 주는 힘이 인상적이었어요. 다음엔 또 어떤 일을 하고 계실지 기대하고 있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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