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
2022. 08. 15.
1987년 12월 학력고사.
역대 입시제도 사상 최악으로 평가되는 선지원 후시험 첫 해였다.
당시 고3이었던,
아침에 그리 나쁘지 않은 컨디션으로 눈을 뜬 J는
두어 시간 후 죽음의 질주가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선지원 후시험 제도는
지원을 먼저 하고 나서 학력고사를 치르는 제도이자,
지원한 대학에서 고사를 치르게 하는 제도였다.
딱 2년 시행하고 부작용이 많아 폐지된 제도다.
부작용이란, 자신의 점수를 모른 채 지원하다 보니
단군 이래 최대의 눈치 작전이 펼쳐졌다는 것과
고사장이었던 대학 주변 교통 대란,
두 가지였다.
아.......
길이 너무 막혔다.
그 많은 수험생들이 지원한 대학에 가서 시험을 보다 보니 서울 지역 대학 주변 도로가 심하게 정체됐다.
주요 대학의 경쟁률도 예년보다 높아서 예상보다 많은 수험생이 일시에 몰린 것도 한몫했다.
J는 초, 중, 고등 12년 동안 지각 한 번 안 했지만 학력고사 날 지각을 했다.
고사장에 들어간 시간은 1교시가 시작된 지 15분 정도 지나서였을 것이다.
J가 아침에 게으름을 피워서도 아니고 아파서도 아니었다.
일찍 일어나 최선을 다해 준비하였으나 운명의 여신이 그날 등을 돌린 것인지, 결국 지각을 한 것이다.
사실
이유가 있긴 하다. 평생의 숙제와도 같은 가족과 연관된 일이다.
바로 나가면 될 정도로 준비를 다 마친 J는 초조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같이 가자면서 그제사 머리를 감고 있는 언니를 기다렸다.
괜찮다고, 시간 넉넉하다고, 너는 너무 미리 준비하는 게 탈이라는 쿠사리를 먹어가면서.
택시를 타고 가다가 다시 전철로 갈아타고 00대 입구에 갔지만 이미 도로는 거의 마비상태였다.
00대 입구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언덕을 넘었지만,
차에서 내려야만 했다.
언덕 꼭대기부터 정문까지 도로는 이미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그날 택시에 여학생 6명이 탔던 것 같다. 우리는 바로 내려서 뛰었다.
J는 언덕에서 정문까지, 정문에서 다시 고사실이 있는 건물까지, 도합 30-40분 전력질주를 했다.
심지어 오르막이었다. 머릿속에 노래지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중간에 발목을 삐끗했지만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이때 삐끗한 발목이 평생토록 부실해져 여러 번 재발하고 있다)
이상하게 방향 감각마저 상실하여 정문 반대 방향으로 뛰다가 다시 유턴을 하기도 했다.
정문 로터리가 회전식이어서 헷갈릴 만도 했지만,
초등 2학년 릴레이 역주행이 우연이 아니었다.
당황하면 방향 감각을 상실하는 J인 것이다.
12월 입시한파가 극에 달한 날이었지만 고사장에 도착한 J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아마자 바로 문제를 풀었다. 1교시 국어, 한문은 그냥 기계적으로 풀었다.
1교시 끝나고 화장실 다녀온 후 시작된 2교시 수학과 국사.
멘털이 무너지면서 안 풀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당시 수학이 학력고사 사상 역대급 고난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했던 J는 모든 것이 아침부터 뛰느라 정신이 나간 자신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국사도 연대가 꼬이면서 고려시대와 조선 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임오군란과 신미양요가 마구 꼬이기 시작했다. 결국 시험을 망쳤다.
그날 아침의 막막하고 힘겨운 뜀박질.
그렇게 피하고 싶었던 달리기를 하필 제일 중요한 날 홀로 맞닥뜨려야 했단 말인가!
J를 택시 태워 보내고 그 자리에 있었던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1톤 트럭 짐칸에 남학생 십여 명이 가방도 던지고 필통과 수험표만 손에 쥔 채 올라탔다고 한다.
6.25 피란 행렬을 방불케 했다고. 그들도 언덕에서 다시 내렸으리라.
주변에 있던 지각생 어머니들은 손에 손 잡고 언덕을 걸어 넘어 정문까지 갔다고 한다.
정문에 엿을 붙여야 수험생 어머니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이 되는 시대였다.
그 매서운 한파에 고무신 신고 발발 떨던 어느 시골 학부형을 J의 어머니는 지금도 기억한다.
J는 1988년 1월 어느 날,
지원했던 대학의 커다란 대운동장 한 켠에서 자신의 이름이 없는 합격자 게시판을 멍하니 바라보게 되었다.
바람 찬 날이었다.
이어 종로학원 입학시험 보러 간 날도 매서운 바람이 뺨을 때렸다.
1988.
올림픽으로 전국이 떠들썩하던 그때 J는 재수를 했다.
학력고사 날의 그 처절했던 달리기는
결국 낙방의 시그널이었다.
정말 악연 아닌가.
달리기는 진정 진퇴양난의 외나무다리에서 J의 뒷목을 움켜잡고는 경계 밖으로 마구 밀어낸 원수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