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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빈 Mar 18. 2024

오늘부터 차린이입니다!

고3 때 딴 운전면허증, 7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오다

수능 끝나고 첫 등교날, 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던 건 운전면허 필기시험 기출문제였다. '운전면허=어른!!' 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기보단 '수능 끝=운전면허 따야지~' 라는 생각이 공식처럼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중에 필요할 때 따려면 힘들기 때문에 미리 따놓는 게 좋다는 말을 많이 듣기도 했고 2살 차이 나는 오빠도 수능 끝나고 바로 땄기 때문에 나도 딴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우리집엔 35년 무사고 경력에 빛나는 자칭타칭 베스트드라이버, 아빠가 있다. 엄마는 오빠와 내가 어릴 때부터 아빠가 하는 것처럼만 운전하면 최고라고, 크면 아빠한테 사소한 것 하나까지 빠짐없이 다 배우라고 습관처럼 말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보기에도 아빠는 정말 운전을 잘한다. 그냥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와, 이게 된다고?' 싶은 좁은 곳에도 주차를 하고 차가 정차해 있는지 주행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부드럽게 운전을 한다.


그래서 크면 운전은 당연히 아빠한테 배운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그때가 온 것이었다! 그렇게 수능이 끝나자마자 바로 운전면허시험에 돌입, 운전학원에 다니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아빠한테 배워서 면허를 땄다.


고3 때 면허를 딴 얘기를 하자면, 하하, 할 말이 참 많다. 그중에서 제일 굵직한 사건 두 가지만 말해보겠다.



첫 번째, 필기시험


문제집을 사는 게 아깝게 느껴져서 도로교통공사 사이트에 있는 기출문제 몇 개년 정도를 프린트해서 쭉 풀어봤다. 고3 수능 직후라 그런지 머리도 한창 잘 돌아가기도 했고 지금 생각하면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필기시험 정도야 식은 죽 먹기로 합격할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때였다. 


법규로 정해진 규정속도나 범칙금 금액 같이 외우지 않으면 정답을 맞힐 수 없는 걸 제외하곤, 상식선에서 이해하려 노력했다. 아빠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상식선에서 풀면 다 풀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줬다.


필기시험날.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뜨는 문제를 제한시간 내에 풀면 됐는데 뭔가 이상했다. 기출문제를 풀 땐 그림이나 사진이 전혀 없었는데 절반 이상의 문제에서 도로 상황이 그림과 사진으로 나왔다. 기출문제를 풀 땐 지문을 읽고 도로 상황을 혼자 머릿속으로 상상하면서 풀었어야 했는데 그림과 사진으로 설명해 주니 오히려 더 쉬웠다. 이해가 두 배는 빠르게 되는 것 같았다. '아, 원래 실제 시험에서는 시험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설명이 추가되나?' 도로교통공단의 따뜻한 배려심에 내심 미소가 나왔다.


시험지를 제출하니 결과가 바로 나왔다. 87점으로 무난하게 통과하고 시험장을 나와서 아빠한테 자랑스럽게 통과했노라고, 그림이랑 사진이 나와서 훨씬 쉬웠다고 하니까 아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림이랑 사진은 원래 나올 텐데?"

"응? 아닌데? 내가 기출문제 풀 때는 없었는데?"


느낌이 이상해서 폰으로 역대 기출문제를 확인해 보니 아뿔싸! 내가 공부했던 건 2종 '보통'이 아니라 2종 '소형', 즉 원동기(오토바이) 관련 기출문제였다. '2종'만 보고 기출문제를 다운받았는데 하필 그게 2종 '보통'이 아닌 2종 '소형'이었던 것이다. 아니.. 2종은 당연히 2종 보통만 있는 줄 알았지.. 소형이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재료를 잘못 넣었는데 결과는 제대로 나온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머리만 긁적였다.



두 번째, 도로주행


필기시험에 이어 기능시험도 통과하고 이제 마지막 관문인 도로주행 시험만 남았다. SUV로 연습을 하다가 세단을 운전하면 시야가 많이 낮게 보일 수도 있다고 방석까지 야무지게 챙겨 들고 갔다. 입김이 펄펄 나는 12월의 어느 이른 아침, 24명의 시험자가 모여 시험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듣고 랜덤으로 순서를 정했다. 24명이니까 그래, 한 네다섯 번째 되면 딱 좋겠네,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1번, 이수빈님."


예? 저요?? 순간 동명이인이 있나 싶어 미어캣처럼 재빠르게 장내를 둘러봤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행운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 무려 24명 중에 1번이라니. 살면서 추첨에서 두루마리 휴지 하나, 연필 한 자루 뽑힌 적 없는 운빨의 소유자인데 여기서 이게 되네... 다들 1번은 피하고 싶었는지 내 이름이 호명되자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내 이름 석자가 타인에게 이렇게나 큰 기쁨을 줄 수 있다니 이거 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순서가 정해지자마자 바로 담당 감독관이 나를 인계하러 와서는 노란 엑센트로 인도했다. 감독관은 엄마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분이었는데 상냥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중립적인 표정과 말투로 나를 대했다. '그.. 그래.. 뭐.. 빨리 치면 빨리 끝나고 갈 수 있으니까 좋지..'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지만 이미 심장은 터질 듯이 쿵쾅댔다.


도로주행은 시험차량에 시험자 두 명, 감독관 한 명, 총 세 명이 함께 차를 탄다. 내가 운전석에 앉고 감독관이 조수석에 앉고 2번 시험자가 참관자로 뒷좌석에 동승했다. 떨리는 손으로 시트와 미러를 맞춘 후 태블릿 pc에서 동그란 버튼을 누르니까 랜덤으로 내가 치를 코스가 나왔다. ABCD 코스 중에 내가 걸린 코스는 A코스였다. 유턴만 신경 쓰면 괜찮은 비교적 쉬운 코스였기 때문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행히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은 조금씩 제 속도를 찾아오고 있었다.


출발은 산뜻했다. 연습했던 대로 시동을 걸고 사이드브레이크를 내리고 기어를 P에서 D로 바꾸고 엑셀에 발을 살포시 얹었다. 털털거리는 낯선 엔진 소리에 잠깐 놀랐지만 다행히 차는 부드럽게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변수가 생겼다. 방석을 깔았는데도 생각보다 더 땅으로 푹 꺼진 느낌이었다. 연습할 때보다 시야가 너무 좁게 느껴졌다. 


그래서 40km로 천천히 달리고 있는데 감독관이 "60km까지 밟아보세요." 라고 나긋하게 말했다. 긴장한 상태기도 했고 곡선이 있는 도로라 연습할 때 늘 천천히 갔었는데 지금 속도를 내라고 하니 살짝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감독관이 밟아보라는데 어떡하나, 밟아야지. 사고 안 날만 하니까 밟으라고 하겠지? 차가 서서히 속도를 내며 빨라졌다. 핸들을 쥔 손에 힘이 엄청 들어가고 발도 달달 떨렸다. 초보입장에선 60km로 달리는 것도 꽤나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속도가 빨라지니 은근히 신이 났다. '오, 이제 이 속도도 감당 가능한 거 같은데? 괜찮은데? 하나도 안 무서운데??' 시험을 치는 중인데 이렇게 기분이 좋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스피드에서 오는 쾌감이 상쾌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연습할 때는 여기쯤 오면 저 앞에 있는 신호등이 항상 빨간불이었는데 어라? 오늘은 초록불이었다. 내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싸하다.' 점점 정지선에 가까워지는데 신호등은 여전히 초록불이었다. 초록불인데 브레이크를 밟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엑셀을 밟기엔 자신이 없었다. 저 초록불이 금방이라도 빨간불로 바뀔 것만 같았다. 달려가는 노란 엑센트가 청춘물에서 공포물로 바뀌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한 오른발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 속에 빠져있을 때, 아니나 다를까 애매한 위치에서 신호등이 노란색불로 바뀌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울려 퍼진 한 마디.


'정지선 넘는 건 신호위반, 바로 실격이라고 했는데?!!'


지금 여기서 브레이크를 밟으면? 무조건 정지선을 넘는다. 자,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때마침 도로는 한가했고 내 앞에 다른 차량은 없었다. 정지선 넘어서 바로 실격되느니 감점되는 게 낫지 않을까? 1초의 찰나, 에라 모르겠다, 못 먹어도 고! 그대로 액셀을 밟았다. 만난 지 이제 겨우 5분 남짓된 엑센트가 출렁이며 앞으로 돌진했고 운명공동체로 묶인 우리 셋은 몸이 뒤로 밀리며 좌석과 밀착됐다.


옆에 앉아있던 감독관이 아무 말 없이 나를 쓱 보더니 태블릿에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아마 감점을 기록하는 거겠지.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눈은 정면을 보고 있었지만 온 신경은 옆을 향했다. '실격.. 인가?' 


다행히 감독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노란 엑센트는 그 뒤로 몇 분을 더 달렸다. 차 안은 숨소리를 제외하곤 어떤 말소리도 흐르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유턴 신호를 기다리는데 어찌나 어색하던지. 그래도 실격 아닌 게 어디며 멈추라고 안 한 게 어딘가. 그렇게 차도 사람도 면허시험도 모두 죽지 않고 무사히 시험장으로 돌아왔고, 결과는.. 80점으로 합격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도로주행을 할 때 감독관이 일부러 속도를 내보라고 한 후 애매하게 신호에 걸리게 해서 떨어뜨리기도 한다는 소문이... 물론 괴담처럼 떠도는 얘기니 믿거나 말거나지만! 하핫!





아무튼 일련의 과정을 거쳐 2주 만에 네모나고 단단한 운전면허증을 손에 쥐게 됐다. 더 기분이 좋았던 건, 운전면허를 따고 나서 아빠가 잘 따라와 줘서 고맙고 고생했다면서 그 당시 운전학원비용이었던 40만 원을 준 것이다!! (아빠 최고:))


그 후론 운전면허증을 쓸 일이 없어서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2023년 7월 11일, 운전면허를 딴지 7년 만에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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