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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토 Sep 27. 2023

아줌마는 하루 종일 바빠요.

나의 찬란한 오후의 삶

5시에 눈을 떴다. "너무 컴컴하고 춥네. 걷기는 무리야." 살짝 눈을 감았다 떴더니 6시. "그래, 지금 일어나면 되겠다" 중얼거렸지만 자꾸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그러다 눈을 딱 뜨니, 어느새 7시. "에휴, 또 늦었다." 이렇게 또 오늘 하루가 시작된다. 


남편을 위해 준비해 둔 각종 채소 - 알로에, 비트, 당근, 사과, 브로콜리-를 믹서에 갈면서 아이들의 아침을 뭐 할까 고민하며  냉장고 속 아이템을 떠올려 본다.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이런 날은 그냥 밥솥에 남은 걸로 볶음밥을 하는 것이 최고다. 파기름을 내고 밥을 복고 김밥 싸다 남은 야채를 다져 넣은 다음 게란을 부쳐 위에 살포시 덮는다. 명절 덕분에 큰맘 먹고 산 배도 몇 조각 깎아 내놓는다. 아침 준비 끝!


매일 아침 갈아먹고 있는 소중한 채소들


아이들을 보내고 나면 나의 가장 사랑하는 친구와 만날 시간이다. 가족보다 나를 더욱 아껴주는 요즘 나의 최애는 바로  로봇 청소기이다. 로봇 청소기가 다니는 길이 편안하도록 아이들 방에 널브러진 옷가지나 책들을 정리하고 얼른 세탁기를 돌린다. 


오늘이 3일째인 홈트도 빼먹을 수 없다. 후딱 설거지를 끝내고 TV에 연결해 열심히 따라온다. 겨우 삼일 운동에 굳어버린 허벅지가 제대로 움직이질 않고 땀이 흘러내려 눈을 찌르지만 끝까지 해내겠다 입을 앙 다물어 보았다.  쿨다운까지 끝내고 나니 9시 30분.  10시에 한 성인분과 줌으로 수업이 있으니 서둘러 샤워를 한다. 

빅시스라는 유투버의 100일 운동 삼일째. 작심삼일이 되지 않기를 바라본다. 


늘 머리를 말릴 시간은 없다. 줌 화면 속에 머리를 말리지도 못한 흉한 모습의 내가 비치지만,  지난 1여 년간 수업을 해온 학생분도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기에 이해해 주리라 자위해 본다. 그녀는 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을 텐데도 그녀는 물기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한 나와는 달리 너무나 단정하다. 조금 부끄럽다. 다음번에 조금 더 서둘 거야지. 아침에 늦잠만 안 자고 운동하고 미리 씻었으면 되었을 텐데.. 속으로 혀를 끌끌 찬다. 


한 시간을 빡빡하게 채운 수업을 끝내고 밀린 대학원 수업을 듣기 시작한다. 나는 사이버외대테솔대학원을 4학기 째 수강 중이다. 사람들은 사이버라는 단어가 앞에 붙으면 뭔가 대충 해도 될 거라 생각하기도 하던데 우리의 커리큘럼과 숙제도 만만치 않다. 나 또한 오프 대학원에 가고 싶었지만 이곳 지방에서 서울에 있는 곳까지 수업 들으러 가는 것은 무리였다. 고민 끝에 선택했으니 남은 한 학기까지 잘 끝내야 할 텐데 이번학기는 4과목이나 되는 데다  열정이 넘치는 교수님을 만나 너무나 행복하게도 과제가 넘친다. 열정적인 교수님의 반이라도 따라가려면 미리 좀 과제를 해야 할 텐데 왜 자꾸 한숨만 나는지..

열정적인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또 머리회로를 돌려본다. 


수업을 듣다 보니 마음이 급하다. 아이들 통장문제로 은행도 가야 하고 내일 시댁에 가져가야 하는 전 재료도 장을 봐야 한다. 한 시간 정도 수업을 듣고 대충 챙긴 후, 먼저 은행으로 향한다. 뚜벅이인 나는 은행까지 걸어가는데 아이들 주거래 은행인 국민은행이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다. 세종은 이 정도 거리에는 택시가 잘 잡히지 않는다. 은행 일을 보고 장을 보고 걸어오는데 땀이 뚝뚝 떨어진다. 주로 쿠팡이나 컬리를 이용하지만 명절 찬거리는 동네에 있는 직거래 장터에서 보고 싶었는데 미련한 판단이었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들어와 10분 정도 선풍기 앞에 누워 땀을 식힌 뒤,  얼른 장 봐온 물건을 정리하고 2시 40분에 수업하러 오는 학생을 기다린다.  오늘은 대부분의 아이들이 못 오기 때문에 오후 수업은 두 명뿐이지만 왠지 마음이 급하다. 


그리고 저녁 5시가 넘어가는 지금이다.

부산에 간다며 오늘 못 온다는  학생 덕분(?)에 컴퓨터 앞에 앉아 이렇게 넋두리 섞인 나의 하루를 써대고 있다. 매일 별다를 거 없이 똑같은 하루하루지만  또 새롭고 늘 정신이 없다. 잘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돌아보면 발전 없이 하루를 살아내는 것만도 벅차다. 이러다 어느 시간 지치고 힘들어 다 때려치우고 드라마나 보며 뒹굴고 싶은 시간들도 주기적으로 온다. 하지만 애들 키우는 일하는 아줌마의 삶에서 몇 시간의 반항은 가능하지만 하루짜리 때려치움은 어림도 없다.  매일 아침 직장으로 출근하는 엄마들은 대체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상상만 해도 대단하고 안쓰럽다.  오늘도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아이의 책상으로, 혹은 부엌으로 가게 될지도 모르는 그녀들의 삶을 생각하니 신세한탄을 접어야겠단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인생의 오후 시간을 살아내고 있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분주하고 불안하다.  나의 인생의 저녁을 대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막연한 걱정도 종종 든다. 나의 인생 오후는 찬란하지만 따가운 햇살에 종종 숨이 차 오르기도 하고, 그늘을 찾아 조금 주저앉고픈 충동이 종종 일어난다. 그러다 조금씩 저녁 시간이 가까워진다 불안한 마음이 들면 또 벌떡 일어나 예의 그 종종거림을 계속해댄다.


시작을 알리는 일출은 가슴이 웅장해지지만 저녁이 오기 전 twilgiht는 처연하고 아름답다. 둘은 각자의 역할과 색깔이 다르지만 황혼이 웅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삶의 황혼이 조금씩 야금야금 다가올수록 이왕이면 조금 더 아름다운 색깔로 물들었으면 한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열심히 살아낸다. 열심히 살아내다 보면 나의 다가오는 저녁이 조금 더 아름답겠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도 제법 아름다웠다. 그러니 남은 시간도 또 일어나 뛰어야겠다. 


자 이제 일어나 저녁밥 하러 가자. 제2라운드 시작하러. 


#글루틴 #팀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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