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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토 Oct 16. 2023

얼마큼 빨리 뛰어야  이 나무를 벗어나죠?

붉은 여왕 효과에 대해

"왜 계속 뛰는 그 자리를 못 벗어나요? 무한루프 같은 거예요?"


고등학교 1학년 3월 영어영역 모의고사를 풀던 한 중학생이 물었다. 올해 3월 고1 모의고사 33번에는 Read Queen Effect (붉은 여왕효과)에 대한 지문이 나왔다.


붉은 여왕효과란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장면에서 유래한 말이다. 붉은 왕은 앨리스를 한 경주에 데려가는데, 앨리스는 아무리 달리고 달려고 여전히 자신이 출발했던 나무 아래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의아해하는 앨리스에게 붉은 여왕은 설명한다.


"여기서는 쉬지 않고 달려야 제자리를 있을 수 있어.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해."


이러한 붉은 여왕효과는 특히 두 가지 영역에서 자주 인용되는데, 그것은 진화론과 경제학이다.


진화생물학과 붉은 여왕효과


미국의 진화생물학자였던 밴 베일런(Leigh Van valen)은 1973년 <새로운 진화법칙 (A New Evolutionary Law)>라는 논문에서 '지속소멸의 법칙"을 설명하고자 붉은 여왕 가설을 제시했다. 여기에 토끼와 그 토끼를 잡아먹는 여우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여우가 더 많은 토끼를 잡기 위해 더 빨리 달리도록 진화한다면, 오직 가장 빠른 토끼만이 살아남아 자손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즉, 새로운 토끼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훨씬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이러한 토끼를 잡아먹으며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빠른 여우만이 또다시 자신의 빠른 유전자를 후손에 남길 것이다. 결국 토끼와 여우는 끊임없이 더욱 빨라지지만 결국 제자리에 머무를 뿐이다. 만약, 모든 토끼가 여유에게 잡아먹히거나  혹은 더욱 빨라진 토끼를 여우가 잡아먹지 못한다면, 둘 중 한 종은 도태되어 멸종하게 될 것이다. 적자생존의 자연환경 하에서 다른 생명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화가 더딘 생명체가 결국 멸종한다는 것이다.


시장에도 빠질 수 없지.


붉은 여왕효과는 경제학에도 등장한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 교수인 윌리엄 P. 바넷(William P. Barnet)은 <조직 진화 내의 붉은 여왕 (The Red Queen in Organizational Evolution>에서 이 가설을 경영학에 접목시켰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이해될 것이다. 경쟁이 시장의 모든 기업을 더 강하게 만든다는 것인데, 더 빠르게 뛰어서 경쟁에서 성공하는 기업은 시장의 승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경쟁 기업은 언제든 나타나기 때문에 쉼 없이 경쟁에서 똑같이 뛰지 못하고 뒤쳐지는 기업은 결국 도태되고 만다.


사람들은 이를 보며 이야기한다. 뒤쳐지면 사라 남을 수 없다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종은 멸종되어 지구상에 살아지고 혁신하지 않고 뒤쳐지는 기업은 시장에서 없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뛰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이 무시무시한 결론은 결국 우리에게 "포모 (fear of missing out)"라는 신드롬을 몰고 왔다. 나만 혼자 뒤처지지 않을까 이대로 가다 나만 혼자 벼락거지가 될 것 같은 불안감은 우리를 항상 불안하게 만든다.


얼마큼 뛰어야 불안하지 않을까?


알랭드 보통은 불안이 생기는 원인을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으로 분류했다. 여우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더 빨리 뛰어야 하는 토끼는 더욱 능력을 발휘해야 하고 끊임없는 혁신과 발전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사람과 사회에 대한 믿음이 없어지면서 버려질 것 같은 결핍은 나의 안전을 보장하게 위해 우리를 더욱 속물로 만들어 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불안하다. 그리고 이렇게 불안하고 나약한 우리에게 사회는 붉은 여왕효과를 내세워 두배로 더 뛰지 않으면 더는 더 나아갈 수 없다고 채찍질한다.


가끔 생각한다. 하루종일 열심히 살고 있는데 왜 나의 삶은 나아지지 않을까? 누군가 성공이나 발전하기 위해서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던 것이 스치듯 지나간다. 열심히 사는 것과 불안에 쫓기는 것은 어찌 보면 종이 한 장 차이인지도 모른다. 긍정을 이야기하면 자기 계발이고 부정을 이야기하면 애정이 결핍된 속물적 세상이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 이 다섯 집단은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수치와 명예의 구분 자체는 유지하면서, 무엇이 각 항목에 속해야 하는지를 재규정하려 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각 세대매다 높은 지위에 대한 지배적인 관념들을 충실하게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럼에도 패자나 이름 없는 사람이라는 잔인한 규정과는 다른 규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정당성을 얻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 판사나 약사의 길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
<알랜드 보통, 불안 중에서>


이를 악물고 두 배 더 뛰어 지금에서 벗어날지 밟고 종종 거리고 매일매일 뛰며 나아가지 않는 내 자리에 끊임없이 불안해할지도 나의 몫이다. 다만 내가 이곳을 벗어나 뛰어나가고 싶은 길이 오직 모두가 가는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언제까지 얼마나 뛰어야 할지에 대한 막막함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다행스럽게도 이 이 시대 진화에 성공한 우리는 우리의 삶이라는 조금 더 복잡한 갈래의 진화길에 서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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