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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두 Jun 19. 2023

애도와 위로

삼각김밥을 한 입 먹으려는데 ‘똑똑’, 열린 도서관 문을 두드리고는 복지사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제거 사면서 하나 더 샀어요.”

하며 건네주시는 종이 봉지에 ‘선생님, 식사 꼭 챙기세요.’라고 적힌 메모가 붙어 있다. 봉지 안에는 샌드위치와 음료가 들어 있었다. 내가 먹지도 못하고 있는 줄 아신 거다. 민망했다. 어제 복지사 선생님이 와서 물으셨다.

“선생님, 제가 이번 주에 출장이 많아서 여쭤보질 못했는데, 월요일에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나는 갑자기 복받쳐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지난 일요일, 송이를 떠나보냈다. 송이는 저녁 8시 무렵에 떠났고 나는 자정이 넘어서 장례식장에 가서 송이를 화장하고 유골을 받아서 돌아왔다. 울어서 얼굴이 퉁퉁 부었다. 두들겨 맞은 듯이 몸이 아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오롯이 슬퍼하고 싶었다. 단 하루만이라도.


7시가 되기를 기다려 교감 선생님께 전화를 했다. 이 시간이면 집에서 출발하셨을 거다.

“교감 선생님, 통화 가능하세요?”

담담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울음이 새어 나왔다.

“강아지가… 으흐흑, 강아지가 죽었어요. 흑흑흑.”

“아이고.”

교감 선생님은 한숨 쉬듯 말씀하셨다. 그래서 오늘 학교에 못 가겠다고, 내일은 출근하겠다고 했다. 통화를 마치고는 앉은 채로 한참을 울었다. 학기 초부터 몇 차례 지각을 한 덕분에 교감 선생님은 내 사정을 알고 계셨다. 정상적으로 출근 준비를 했는데 송이가 오줌을 누고 그 위에 뒹굴면 나는 다시 옷을 벗고 방을 닦고 송이를 씻겨서 털을 말려 눕히고 집에서 나왔다. 교감 선생님은 괜찮다고 하셨지만 학교에 늦을 때마다 체한 것처럼 속이 더부룩했다.     

우리 부서인 인문사회부 부장님께도 연락을 해야 했다. 전화로 말씀드려야 예의겠지만 올해 전근 오신 부장님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다. 아무래도 또 울 것 같아서, 그러고 싶지 않아서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바로 답장이 왔다.

‘슬픈 일이 있으셨군요. 명복을 빕니다.’

그러곤 카톡으로 조의금 봉투가 도착했다. ‘이래도 되나?’ 생각했다. 눈물이 줄줄 쏟아지는 중에도 참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자리에 누워서 손을 뻗어보았다.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지난 몇 개월간 얕은 잠을 자면서 자주 송이를 만졌다. 송이가 경련을 하면 일어나서 마사지했다. 14년 동안 이 집에는 언제나 송이가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게 되고 치매가 오고 몸이 점점 쪼그라드는 동안에도 언제나 함께였다. 몸이 안 좋아지고 목이 꺾이는 사경 증상이 온 뒤로도 내가 안고 마사지를 해주면 내 팔을 베고 잠들었다.

송이가 아프다고 내지르던 ‘앙’ 소리가 자꾸만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울었다.

시간은 평소처럼 흘렀다. 생각해 보니 어제 오후에 김밥 한 줄을 먹은 뒤로 아무것도 먹은 게 없었다. 입맛은 없지만 배는 고팠다. 라면을 끓여 먹었다. 몇 사람에게 송이가 떠났다고 알렸다. 진심으로 놀라고 공감하는 사람도 있고 "힘내!", "잘 이겨내야지." 같은 형식적인 위로도 있었다.  그저 위로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어릴 때는 맘껏 울지 못했다. 울면 부모님이

“안 그쳐? 바보 같이 왜 울어?” 하거나,

“아침부터 재수 없게 눈물 바람이야?” 하며 야단을 쳤다.

우는 게 창피했다. 그래서 울 일이 생겨도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참다가 참다가 울음이 터지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몸을 숨겼다. 이불을 뒤집어쓰거나 책상에 엎드려서 최대한 얼굴을 가렸다. 내가 울 때, 사람들이 모른 척해주길 바랐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 울고 있을 때 나도 최대한 외면했다. 그게 배려라고 생각했다.

     

저녁에 S 작가가 전화를 했다.

“자두 씨, 힘들죠?”

하고 말하는 그의 음성이 잠겨 있었다.

“왜 코가 막혔어, 작가님?”

“나는 몽덕이가 없다고 상상만 해도 미칠 것 같은 거 있지.”

세 살 난 시골잡종 몽덕이와 살고 있는 그는 송이가 올해 몇 살인지, 어떻게 떠났는지 물으며 나와 함께 울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으며 말했다.

“오늘은 실컷 우세요.”    

  

이튿날 출근해서 보니 도서관이 있는 신관 앞에는 ‘금일(4/10) 도서관 휴관’이라고 인쇄된 종이가 붙어 있었다. 학생들이 4층까지 헛걸음하지 않게 교감선생님이 붙이신 거였다. 어젠 왜 연가를 썼냐고 질문을 받을 때마다, 자꾸만 눈물이 터졌다. 송이를 아는 사람들은 내 안부를 물으며 음식과 선물을 보냈다.

나를 향해 내밀어진 손을 떠올렸다. 어깨를 두드려주고 등을 쓸어주는 손.

오래 알고 지낸 동생은 카톡으로 봄 이야기를 하다가 ‘언니, 송이가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라고 했다. ‘이 봄이 송이가 준 선물이라는 말인가?’ 했는데 다음날 샌들이 배송되었다. 푹신하고 편안한 흰색 샌들이다. 고맙다고 했더니 송이랑 산책하던 길을 편하게 걸으라고, 건강해야 한다고 했다.

마음이 예쁘고 고마워서 슬며시 웃다가 눈물이 뚝 떨어졌다.     

혼자 있는 시간은 울기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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