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 관계 전반에 대한 소고
"남녀 사이에 성적인 것이 끼어들지 않는 관계는 없다." 내가 한 말은 아니고, 고(故) 황현산 평론가의 트윗에서 봤던 내용이다. 자세히 풀어보자면, 남녀 사이에 성적인 것이 끼어들지 않는 관계는 없으며, 가까운 사이에서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고도 했다. 백번 동의한다. '남녀'에 과도하게 집중하지도 말고 '남녀'라는 지정 성별을 함부로 뭉개서도 안 된다. 사람과 사람은 제한적인 의미에서만 친구일 수 있고 무제한적으로 친구인 관계는 없다. '친구'라는 말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쓰이는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성 간에 친구가 가능하냐'는 질문 자체가 이상하다. 말꼭지 뗐으니 걍 말하자면, 친구가 못될 건 무엇인지? 처신하기에 따라서 친구는 언제든 가능하고 이건 너무 새삼스러운 말이다.
남자와 여자 뿐 아니라 맹수와 사람조차 친구가 될 수 있다. 어디 동물원에서 사육사와 동물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고 한국의 어느 지역에서 어린 아이와 늑대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아홉 살짜리 여자애인데, 어려서부터 야생에 풀어놓고 키우는 늑대와 교감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웃긴 게 그 늑대는 산에 가서 평소엔 맹수처럼 지내다가 아이가 학교 마치고 늑대가 있는 곳에 가서 부르면 쪼르르 달려와서 반려견인 듯 아이 앞에서 머리를 수굿했다. 하지만 그 아이가 마냥 늑대를 반려견처럼 애완하는 건 아니었다. 굉장히 현명하게도 아이는 맹수라는 걸 명확히 인식하고 늑대를 대했다. 예컨대, 생닭을 조각조각 잘라서 먹이로 줄 때는 보통 반려견에게 그러는 것처럼 엄지와 검지로 잡아서 주둥이에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손바닥을 쫙 펼친 다음에 그 위에 올려놓고 주는 것이다. 굳이 왜 그렇게 주는지 물어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늑대는 반려견이 아니고 맹수이기 때문에 먹이를 줄 때는 저도 모르게 포식자의 본능이 발휘돼서 손을 씹힐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줘야 한다고. 굉장히 현명한 대답처럼 느껴졌다. 모르긴 몰라도, 그 아이는 나중에 커서도 사람과 관계도 그렇게 현명하게 맺을 것 같았다.
그러니 다시 돌아가서, 맹수와 인간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세상에서 같은 호모 사피엔스끼리 친구가 될 수 있냐 없냐 하는 질문은 애당초 우스꽝스러운 질문이다. 각자 처해진 상황의 특수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제한된 조건 역시 서로 이해하고 있다면 남녀가 아니라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와도 친구 할 수 있을 것이다. (톰 행크스도 배구공 윌슨하고도 친구 먹었다.) 반대로 말해서, 서로 처해진 조건에 대한 이해가 없거나 그런 조건을 없는 듯이 뭉개려고 하면 무인도에 뚝 떨어진 남녀라도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것이다. 무슨 젠더에 관한 구성주의 관점 따위의 현학적인 논의까지 갈 필요조차 없다. 오히려 남자와 여자가 처해진 상황이 다르다는 걸 뭉개면서(그게 지정 성별의 차이이든, 신체적인 차이이든, 사회적 통념이든 뭐든), 그 모든 것이 필요 없고 허상이라는 식으로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고 스마트하게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음흉한 셈을 갖고 있다고 본다("늑대와 인간은 모두 생명을 가졌어요" = “여자고 남자고 다 똑같은 사람이야” → 하나마나 한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지금 수염 쓰다듬으면서, '엣헴 남녀가 유별하거늘' 하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있는 걸 없다고 할 순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늑대가 반려견이 아니라 맹수라는 것이다. 가끔 보면 애보다 못한 어른도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