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게으른 러스씨 Mar 06. 2021

[2] 개천에서 용이 나는 이상한 나라

⏤ 20세기형 개천용과 불분명한 헝그리정신에 대해서




"개천에서 용난다",

지나온 시대의 비정상



한 시대를 횡행한 관용어를 살펴보면 과거 우리 사회가 갇혀 있던 괄호, 다시 말해 한계가 선명하게 보인다. 개인적으로 무척 싫어하는 관용어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다. 요즘은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몇년 전까지만 해도 언론이나 방송에서는 입신양명한 사람을 일컫는 말로 '개천용'이 자주 언급됐다.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개천에서 용 나는 걸 자랑으로 아는 것이 아니꼽다. 이 나라에서는 왜 이렇게 개천에서 난 용들이 많은지 모를 일이고, 또 대체 왜 그렇게 개천 출신인 용을 사랑하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이런 가운데서도 잊을만하면 좋은 사람들이 나온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개천 용을 폄하하고 싶진 않다. 이미 태어난 '개천 용'들에겐 아무런 악감정이 없다. 하지만 아직 '개천 용' 서사를 떠받들고 거기에 열광하는 우리에 대해서라면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얼마나 이상한 말인지 금세 알 수 있다. 애당초 개천은 용이 나는 환경 자체가 못 된다. 근데도 개천에서 용을 은근히 바라고 잊을만 하면 나오는 예외적인 스타들을 광적으로 추앙하기까지 하는 건 굉장히 비정상적이다. 효용의 관점에서 보아도 개천에서 용 한 마리를 쏘아올리기 위해서 얼마나 터무니없는 노력이 들어갔을 것이며, 또 얼마나 많은 경제적 가치가 투하되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라면만 먹고 금메달 딴 임춘애가 대체 언제 적 사람인데도 아직도 소환되는 건가. 조금만 생각해도 그게 영광의 역사가 아니라 비극의 역사라는 걸 알 텐데.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개천에서 용 난 서사를 반길 게 아니라 지금 있는 개천들을 바다로 개선해서 애당초 용이 되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미꾸라지들을 구명해야 한다는 게 지극히 자연스런 사고 흐름 아닐까? 지난 세기 무수한 개천용의 사례를 언급했던 것은,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비정상적인 노력으로 비정상적인 인물이 배출된 비정상의 총체다.



소위 개천용지수라고 불리우는 지니 기회불평등지수(GO지수). GO지수가 높을 수록 불평등이 심한 사회라고 한다. 간단히 생각해서 개천에서 용이 안 나는 것은 상식이다.




난세의 영웅을 찾을 게 아니라

난세를 막아야 하는 것



개천에서 용이 나온다는 말을 반백년 넘게 들먹이고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반복하자. 개천은 애당초 용이 날 수 없는 환경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우리는 그런 몇몇 예외적인 케이스에 열광하면서 그런 요행을 부추기고 바라기까지 한다. 우리는 이렇게 기형적으로 예외를 반기를 사회를 산다. 특히 '개천 용' 서사가 권력을 쥔 시정자의 입을 통해서 성공 신화처럼 전파되는 사회는 더 질이 나쁘다. 이때 '개천 용' 서사는, 그 자체로 현실의 수많은 (열악한) 개천을 방치하는 좋은 구실이 된다. 개천에서 나고 자라서 충분한 잠재력을 갖고는 있었으되, 개천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는 무수한 미꾸라지들에게, "모든 책임은 김연아나 박태환 같은 용이 되지 못한 너희의 노오력 부족 탓"이라는 책임 전가 또한 가능하다. 현실의 열악한 개천을 방치하고, 불분명한 '헝그리정신'만 강조하며 구조를 개선시킬 자금으로 자기 뒷배나 채우는 이들이 둘러댈 수 있는 가장 좋은 알리바이가 된다.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물들은 현실의 불공정한 구조를 개선시킬 여지를 막는 구호로 선전된다. 스포츠 티브이 광고는 앞다퉈서 개천용의 눈물겨운 노력 사례를 들먹이며 그들의 이미지를 소모한다. '김연아를 봐라. 박태환을 봐라. 정현을 봐라. 안현수를 봐라. 손흥민을 봐라. 방탄소년단을 봐라. 삼성을 봐라. 현대를 봐라.' 하지만 오래된 금언처럼, 예외는 법칙이 될 수 없다. 오해받은 단 한 명의 천재 시인인 랭보가 있는 사회보다, 그저그런 만 명의 시인이 있는 사회가 여러모로 더 건강한 사회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난세의 영웅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난세가 없어야 한다.


반전(反戰)과 겸애 사상을 폈던 묵자. 그는 난세에 나는 영웅, 즉 개선장군보다 난세 자체를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전쟁의 피해는 돌릴 수 없기 때문.


"止楚攻宋 止楚攻鄭 阻齊罰魯
墨子過宋天雨 庇其閭中 守閭者不內也
故曰 治於神者 衆人不知其功 爭於明者 衆人知之   ―「公輸」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저지하였고, 초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저지하였으며,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막았다. 묵자가 송나라를 지날 때 비가 내려서 마을 여각에서 비를 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문지기가 그를 들이지 않았다.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드러내놓고 싸우는 사람은 알아준다."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끈 사람은 그 공을 칭찬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인 셈이지요. 개선장군에 대한 환호가 그러한 것입니다.
─신영복,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워야?」중.




20세기의 헝그리 정신과 

21세기의 두유노 클럽, 이제는 반성할 때



'두유노클럽'이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다. 그런 밈(meme)이 우스갯소리처럼 거리를 떠도는 건 마냥 반길 일이 아니다. 우리의 문화예술인에 대한 인식과 처우가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이 역설적이게도 한 사회에서 '직업에 귀천이 있다'는 인식이 만연한 바탕 위에서만 성립 가능하다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두유노클럽'이라고 뭐 다를까? 두말 할 것도 없이, 필요는 결핍의 산물이다. 독일 사람에게 '두유노니체'가 있을 것 같나. '두유노벤츠'라고 할까. 과연 미국에서 '두유노잡스' 할까. 새삼스러워서 하지도 않는 말이다. 한 평론가의 말처럼, 우리나라 좋은나라라는 말을 새삼스럽게 반복하는 나라는 이미 좋은 나라가 아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헝그리정신' 따위 운운 하며 '개천에서 용 나는' 이야기는 그만 했으면 한다. ‘한국을 빛낸 백 명의 위인들’ 같은 소리 좀 집어치우자. 그런 얘기하려면, 서유럽의 체계적인 문화·예술인 대한 처우를 보거나, 미국의 과학화된 체육 훈련 시스템을 단 한 번이라도 보고 나서 하자. 그런 나라에서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 아니 '개천'과 '용'이라는 컨텍스트 자체가 없다. 왜냐하면 거기는 아주 많은 곳이 '바다'이고 길에 채이는 무수한 용들이 샌드위치 가게 앞에서 줄서는 나라이며, 옆집 사는 용과 친구 먹는 것 자체가 하나의 컨텍스트이기 때문이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을 열악한 개천을 백날천날 개천 상태로 방치해도 된다는 말로 곡해하는 우리와는 사고의 폭과 깊이 자체가 다른 것이다. 부디 부끄러워했으면 좋겠다. 거기서부터 시작이니까.




작가의 이전글 [1] 창작자와 피드백에 대한 오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