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자가 피드백을 수용하면서 발전한다는 논리에 대한 극히 사적인 반박
평소 힙합아티스트들을 좋아해서 작업할 때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서 인터뷰나 관련 영상을 찾아보기를 좋아한다. 약간의 취미랄까. 드러내놓고 덕질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즐겨 듣는 아티스트가 씬 안에서 교류하고 이런저런 작업을 하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흐뭇해하는 타입이다. 멜론이나 네이버 뮤직 같은 플래폼에 들어가서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앨범 댓글을 확인할 때도 있다. 최근에는 신보인 유시온(Yuzion)의 정규 앨범 [Yours Truly]에 대한 코멘트를 발견했다. 댓글창은 늘 그렇듯 좋냐 안 좋냐로 갑론을박이었다. 그 와중에 리스너끼리 논쟁 중에 누군가가 단 댓글을 보았다. 내용인즉, "꼬우면 듣지마"라고 옹호하는 팬들을 다시 비판하는 코멘트였다. 해당 코멘트를 단 사람은 잘하는 래퍼든 못하는 래퍼든 피드백을 수용해야 발전이 있는 것인데 "꼬우면 듣지마"라고 하면 그런 의견 자체를 막아버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발전하려면 피드백에 귀 막고 "꼬우면 듣지마" 해선 안 된다는 것. 그러나 과연 그럴까? "아티스트는 리스너의 피드백을 잘 수용하고 소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맘 편한 리스너의 관점이다.
온라인이 활성화되기 이전의 아티스트들은 작업물을 발표할 수 있는 매체가 제한적이었다. 자기가 활동하는 지역 뿐 아니라 시대와 그 기술상의 제약에도 매여 있었다. 피드백 역시 한줌밖에 안 되는 동료나 업계 사람에게서 간혹 받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물리적 제약이 아이러니하게도 도움이 되었다. 아티스트들은 '물리적 제약' 덕분에 더 자기 작업물과 독대하는 시간이 길었으며, 완성한 이후에도 그것을 혼자서 차분히 바라볼 충분한 여유를 가졌던 것이다. 무관심과 고독 속에서 홀로 내팽게쳐져 있을 위험이 늘 상존했고 (분야마다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피드백 역시 극히 제한된 업계 사람들에게만 받을 수 있었을 테지만, 뒤집어 말해 함부로 공중에 노출되어서 서투른 망평으로 움츠러들 염려는 적었다. 무플으로 고통받을지언정 악플로 짓밟히지는 않았던 셈이다. 오늘날 우리는 초연결된 사회의 모습을 당연히 여기겠지만, 스마트폰이 상용화 되고 본격적으로 SNS가 활용된지가 불과 20년이 채 안 된다. 역사에서 천재라고 불리웠던 대다수 아티스트들이 창작 활동을 해왔던 상황과 여건이 오늘과 많이 다르다. 오히려 예외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은 현재의 우리라고 해야 옳다.
그러므로 다시,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창작의 관점에서 예외적인 시기다. SNS를 통해 아티스트의 의지와 달리 작품이 이리저리 퍼져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며, 좋든 싫든 불특정 다수의 피드백에 노출된다.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해서 한 마디 걸치는' 상황 속에서도 창작을 해 나가야 한다. 아티스트들은 '풍요 속의 빈곤'을 경험한다. 조금만 주목 받아도 엄청난 피드백이 주어지기는 하는데 어쩐 일인지 그 피드백에는 '말하는 이의 얼굴'이 지워져 있다. 다 양보해서 그중에서 드물게 읽어볼 만한 코멘트가 있다고 하더라도, 영양가 있는 코멘트 하나를 찾기 위해서 걸러내야 할 악플의 숫자를 생각하면 도무지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 옥석을 가리겠다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겠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SNS시대를 살아가는 아티스트에게 "꼬우면 듣지마"라는 태도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과감히 말해, 커뮤니티나 플래폼에서 댓글로 '피드백'을 하려는 사람들에게서는 배울 점이 없다고 생각해도 좋다. 당장 어느 분야든 커뮤니티를 들어가 보라. 건전한 비판 정신 운운하면서 은근히 자기 식견을 자랑하거나, 자극적인 언사로 동조 받고 싶어서 공연히 주목이나 끄는 얼치기들을 보게 될 테니. 내 경험상 제대로 된 피드백은 비판의 내용만큼이나 그것이 받아들여질 만한 상황을 조성하는 데도 신경 쓴다. 그런데도 온라인상에, 하물며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된 공간에 날카로운 피드백을 남긴다고? 화장실 낙서에서 구원을 얻을까?
비평이 없는 곳에 진보 또한 없다. 그러나 서투른 망평(妄評)이야말로 돋아나는 새 움(芽)을 해칠 염려가 많다.
─홍난파, 『광상소곡(狂想小曲)』중.
아티스트들은 슬프지만 모순된 현실에서 출발해야함을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그 현실이란, 자신의 작품을 좋아해줄 사람까지 포함해서 대다수는 작품을 소비할 뿐이며 '소비자'에서 '생산자'의 위치로 이행해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다. 고작해야 커뮤니티 게시판이 뻘글이나 쓰고 이상한 댓글이나 달면서 "피드백을 수용해야 발전이 있다"는 식의 말로 아티스트들을 은근히 겁박하지만, 정작 그런 말이 구체적인 현장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극도로 무지하다. 실제로 내 주변에서 활동하는 친구들만 봐도 그렇다. 무수한 피드백 속에서 발전하는 아티스트보다, 밋밋하게 대중의 취향이라는 사포로 깎여나간 채 시름시름 죽어가는 아티스트가 백 배는 많다. 게다가 현실의 창작판은 '멀리서 보면 질투심으로 이뤄진 거대한 성단'이라고 하니, 필요한 태도는 "꼬우면 듣지마" 유의 광적이기까지 한 자기 확신이 아닐까.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그 발언의 진위나 저의도 따져 묻기 어려운 이들의 피드백에 마음 쓰지 말기를 권한다. 대신 사랑하는 동료를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다. 이미 많은 아티스트가 앨범을 기획하고 녹음하고 믹스/마스터링 해서 완성하고 배포하는 단계에서 주변 아티스트로부터 무수한 피드백을 듣는 것으로 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기본적인 엔지니어링 원리도 모르는 리스너가 잘 알까, 아니면 음악을 전문적으로 듣고 전문적으로 만들기까지 하는 동료 아티스트가 더 잘 알까?
한 마디 덧붙이자면, "피드백을 수용해야 발전이 있다"는 말도 걸러 들어야 한다. 내가 매번 하는 소린데, 70억 인구의 모든 의견을 한 데 모아서 반영하면 완벽한 마스터피스가 탄생하지 않는다. 정확히 그 반대다. 70억 인구의 목소리를 한 데 모으면 그건 그냥 완벽한 소음공해일 뿐이다. 70억 피드백을 들으면 좋다고 주장하는 바보들은 오늘날 국가의 정치 체제가 왜 만들어졌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70억 개의 투표지 열어서 칠판에 바를 '正'자 기록하는 역할 맡기고 싶다.
아티스트가 창작물에 들인 시간과 노력은 아티스트 본인만 안다. 들인 시간과 소비되는 시간 사이엔 거대한 비대칭이 있고, 창작자와 소비자 간의 오해는 여기서 발생한다. 아티스트는 자기 작업에 들인 시간과 노력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눈이 멀고, 대다수 리스너는 그런 건 모르니 노력을 폄하한다. 대다수 아티스트들은 들인 시간과 소비되는 시간의 거대한 비대칭 틈에 끼어서 압사당하는데, 여기 하나 더 끼얹어지는 것이 "피드백을 수용해야 발전이 있다"는 따분한 논리다. 쇼펜하우어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수준 이상으로 타인을 볼 수 없다"라고 말했다. 남의 작업물 보고 새로움이 없다고 한탄하기 이전에 자기가 새로운 것이 나오면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있긴 한지 먼저 물어야 문명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피드백을 듣던 말건 그건 아티스트 본인의 권리이지 리스너가 '진리'로 포장해서 해야만 한다고 들이밀 수 있는 원칙이 아니다. 아티스트는 스스로 충분히 고민했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할 권리가 있다. 그래도 꼬우시다고요? 그럼 듣지/보지/읽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