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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 Feb 20. 2024

콩콩(트렘폴린)

내 유년시절의 친구

 


 내 어린 시절 작은 동네에는 하나뿐인 초등학교와 중학교 사이에 트렘폴린이 있었다. 누가 먼저 명명했는지 모르겠으나 우린 그것을 콩콩이라고 불렀다. 초등학생 5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트렘폴린이 3개가 ㄱ자로 놓여 있었다. 천막이나 안전망 같은 장치 없이 트렘폴린 3개만 길가 옆에 덩그러니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아이들의 놀이시설이라기보다 석연치 않은 구조물처럼 보였다. 그 주위는 자갈밭과 차가 지나다니는 콘크리트 도로여서 자칫 밖으로 착지하면 위험했다. 난 아무도 없는 쓸쓸한 해 질 녘 트렘폴린의 전경을 왠지 모르게 두려워했던 기억이 있다. 다른 친구들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난 이 트렘폴린이 저주를 받았다고 몰래 생각했다. 혼자서 그곳을 걸어갈 적에 날 유혹해서 신나게 놀게 만든 다음, 최고로 높게 뛰게 만들어 콘크리트 바닥에 처박아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가 트렘폴린을 잘 못 뛰어서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리며 죽는 상상을 했었다. 어린 날에는 대체 왜 그런 기괴하고 잔인한 상상을 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난 늦은 밤 혼자서 그곳을 지날 때면 일부러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걸었고 절대 혼자서 트렘폴린을 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 트렘폴린에서 내 또래 애들 중 누구보다 많이 놀았다고 자부한다. 난 앞돌기 옆돌기, 고급기술인 뒷돌기와 두 번 연속 돌기도 할 수 있었다. 대담하게 트렘폴린 사이를 앞돌기를 하며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다. 트렘폴린을 잘 타는 것은 나의 비밀스러운 자랑거리였다. 아무도 모르고 알아주지도 않지만 나는 나의 기술에 으쓱하곤 했다. 친구들과 트렘폴린에서 뛰고 나자빠지며 노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제일 좋았던 것은 체력이 다 빠져 지쳤을 때쯤, 트렘폴린에 大자로 누워 미세한 흔들거림을 느끼며 하늘을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떠다니는 구름을 보고 있으면 내가 하늘에 닿아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구름은 하늘을 떠다니는 작은 돛단배 같았다. 어느 날은 트렘폴린 위에서 몇 시간 동안 만화책만 보기도 했고 한여름 친구랑 냇가에서 물놀이를 하고 뜨거워진 트렘폴린 위에서 일광욕을 하며 옷도 말렸다. 심지어는 포경수술을 하고서도 뛰어댔으니 트렘폴린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새삼 놀랍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행위와 시간은 자유라는 것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자유라는 것은 실재하는지,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어렴풋이 기억하기론 500원에 30분 이용할 수 있었는데, 트렘폴린 주인장인 할머니가(우린 그 할머니를 콩콩할매라고 불렀다) 의자에 시험감독관처럼 삼엄하게 앉아 작은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체크했다. 시간이 다 끝나면 콩콩할매는 크게 '내리라'라고 화난 목소리로 소리치셨다. 트렘폴린 이용시간의 시작과 끝은 절대적으로 콩콩할매의 재량이었는데, 우린 이용시간이 끝나면 항상 아쉬워했고 콩콩할머니가 원래의 시간보다 더 일찍 내려오라 한다고 칭얼거렸다. 좀 고약한 애들은 할머니에게 사기 치지 마라며 따졌고 뒤에서 들으라고 욕을 하기도 했다. 또는 몇 번이고 내리라고 말해도 듣는 둥 마는 둥 계속 놀다가 할머니가 지팡이를 들고 의자에서 일어서면 그제야 낄낄거리며 도망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몹쓸 짓이고 그 때문에 할머니는 늘 신경이 곤두서 있고 화가 나 계셨나 보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여느 때와 같이 트렘폴린 위에서 누워 있다 할머니를 무심코 쳐다보았는데, 할머니는 즐겁게 노는 우리들을 보며 살며시 미소 짓고 있었다. 노파의 미소는 부처의 얼굴처럼 온화하고 자비로웠다. 우리들의 미움과 분노, 어리석음을 용서하고 품어주는 미소였다. 다 큰 성인이 된 나는 콩콩할매의 미소를 회상하며 아마 그녀는 트렘폴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누구보다 사랑하지 않으셨을까 생각해 본다. 그날 할머니는 우리들을 이용시간이 지나고도 한참 더 놀게 하셨다.


 난 중학생이 될 때까지 콩콩을 탔다. 친구들은 철이 들고 몸집이 커져서 더 이상 타지 못하거나 타지 않았지만, 나는 사춘기가 늦게까지 오지 않았고 왜소했고 작았다. 무엇보다 콩콩을 타는 게 아직 너무 좋았다. 콩콩을 타는 친구들은 하나둘씩 사라져 갔고 나보다 어린아이들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나는 어린아이들 틈에서 창피한 줄 모르고 신나게 뛰어놀았다. 하지만 나 역시 자랐고 콩콩이 더는 나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고등학생이 되고 근처를 지나가다 트렘폴린이 쓸쓸히 있는 것을 보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고 괜스레 트렘폴린을 눌러보았다. 몰래 뛰어볼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트렘폴린은 녹슬었고 칠이 벗겨져 있었으며 중간중간에 스프링도 빠져있었다. 콩콩할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나는 슬퍼서 울었다. 나의 유년시절 트렘폴린 위에서의 즐거웠던 추억을 슬퍼했고 점점 멀어지는 과거의 기억을 슬퍼했다. 초라해져 버린 내 오랜 친구였던 콩콩을 보며 슬펐다. 다음에 그곳에 갔을 때 콩콩은 철거되어 있었다. 나는 콩콩을 타러 신나는 발걸음으로 뛰어가던 어린 시절 나를 떠올려본다. 마을 어귀에 큰 정자나무의 그늘을 지나고 나면 따뜻하게 날 맞이 해주는 친구가 있었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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