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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란 Mar 26. 2024

행궁동 이야기

※ 2024년 2월 18일, 작업실103호 모임에서 '그날의 장면'을 주제로 쓴 글입니다.



“언니, 이리 와봐요. 여기 너무 예뻐요.”


잘 정비된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잠시 내려와, 발길 닿는 대로 골목골목을 누비며 걸었다. 어느덧 해가 질 무렵이라 노을을 볼 수 있는 곳이 없을까 싶어 강 근처로 들어갔다. 우연히 들어선 곳에는 보랏빛의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건물도 없고 사람의 발길도 거의 닿지 않는 곳에 펼쳐진 꽃밭을 보고는 잠시 넋을 놓았다가, 저 멀리 지는 해와 이 장면을 남겨야겠다 싶어 사진에 몇 장 담았다.


행궁동에 처음 간 것은 10년 전쯤이었다. 수원에 사는 친구가 동네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수원화성으로 몇몇을 불러 모았다. 그때는 행궁동이라는 지명도 모른 채 그저 장안문 앞 보영만두에서 만두와 쫄면을 먹고 성곽을 따라 걸었다. 성곽 안쪽으로 자리 잡은 야트막한 건물들이 보기 좋았지만, 지금처럼 상점이 빽빽하게 들어서지는 않았을 때였다.


그러고는 몇 해가 흐르고 다시 행궁동을 찾았다. 요즘 여기가 뜨고 있다며 수원에 살던 친한 언니가 가이드를 자처하고 나선 덕분이었다. 책방 브로콜리숲에서 한참을 머물렀고, 일정하지 않은 모양의 골목을 이리저리 누비며 걸었다. 보랏빛 꽃이 가득한 그 공간도 언니와 함께 걷다가 발견했다. 해 질 녘에 마주한 선물 같은 장면이 잊히지 않아서, 나는 그 동네를 좋아하게 됐다.


그 이후로도 서너 차례 더 행궁동으로 향했다. 주로 보영만두에서 만두와 쫄면을 먹고, 장안문에서 서장대까지 걸어 올랐다. 지칠 무렵엔 정지영커피로스터스에서 아메리카노나 아이스 라떼를 마셨다. 중심 골목이 점점 넓어지고는 있지만, 성곽 안에 자리한 땅덩이가 감당 불가능하게 넓지는 않아서 맘먹은 곳은 걸어서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 행궁동의 가장 좋은 점이었다.    


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행궁동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꽤 간편한 선택이었다. 에세이 모임에서 누군가 글에 담은 파스타 오마카세 ‘픽키파스타바’에 관해 읽고, 여기다! 싶었다. 남편에게 작년 봄 처음으로 행궁동을 소개해주었을 때 반응이 나쁘지 않았고, 집에서 차로 40분이면 널찍한 주차장에 안착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갑작스레 영업을 중단한 ‘픽키’에는 가지 못했지만, 덕분에 오랜만에 행궁동을 누리는 행운을 아주 잘 누렸다. 잘 조리된 생면파스타가 먹고 싶어서 찾아보다 ‘이티비티파스타하우스’에서 식사를 했는데, 와인 한 잔 곁들이고 싶은 훌륭한 맛의 파스타를 먹어 든든하니 기분이 좋았다. 며칠 전에는 ‘책방 그런 의미에서’가 시즌 투 매장을 행궁동에 오픈한다는 소식을 인스타그램을 통해 접했는데, 마침 딱 이틀뿐인 가오픈 기간이 내가 가는 날과 겹쳤다. 게다가 식사를 하는 파스타집과 아주 가깝기까지, 이것은 운명이로구나. 생각하고 조용하고 널찍한 책방에서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


어느새 북적이는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들어간 카페는 인테리어도, 커피 맛도 내 취향이었다. 책방에서 구입한 책을 잠시 읽고,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기에 좋았다. 기념일에는 사진을 남겨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미리 예약해 둔 셀프 스튜디오를 시간 맞춰 찾았다. 둘 다 썩 포토제닉 한 타입은 아닌지라, 적당히 정직한 자세와 웃는 표정으로 승부를 보았다. 한 해를 기념할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이 흑백으로 남았다.


예정된 일정을 마치고는 오랜만에 느끼는 한낮의 온기에 두터운 외투를 벗어 들고 걸었다. 옷을 여미지 않아도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온기가 반가웠다. 부쩍 따뜻해진 날씨를 기다린 사람이 나뿐만은 아닌지, 기분 좋은 표정을 한 사람들이 곳곳에 넘쳤다. 특히 커다란 열기구 모양의 비행선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창룡문 앞 잔디밭에는 연 날리는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서있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 연은 가만히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오니 바람이 불면 실을 풀고, 바람이 옅어지면 실을 당기며 쉼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손끝이 보였다. 한 가지에 집중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저마다의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나도 아이의 손을 잡고 연을 날리러 와야지, 하는 생각도 했다.


좋아하는 동네는 좋은 기억이 쌓여 만들어진다. 좋은 기억이 있는 곳에서 좋은 날을 보내고 나면, 실타래처럼 좋았던 기억이 풀려 나온다. ‘이 골목은 누구랑 걸었는데 저 가게 커피가 맛있었어.’, ‘여기서 저쪽으로 가면 진짜 예쁜 장소가 나와.’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며 걸을 수 있는 동네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좋은 기억은 내일을 기대하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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