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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현 Oct 23. 2020

겁쟁이 엄마의 100일 자동차 여행기 #35

프랑스 영국 아일랜드

Day 35, 7월 16일 안시(Annecy)




오늘은 숙소에서 가까운 안시라는 호수가 예쁘다는 곳을 방문할 예정이다.


샤모니는 정말 압도적으로 멋진 곳이었다. 묘하게도 이 마을을 떠나려는데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정말 설레게 하는 곳이었다.  발랑솔의 라벤더와 해바라기 밭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기쁨과 슬픔이 이곳에서도 동시에 느껴졌다. 차에 짐을 싣고 마을을 벗어나는데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서운했다.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을 남겨두고 떠나는 심정으로 눈물이 날 정도였다.







호수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안시(Annecy) 성이 있다. 성 앞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마을을 돌아보기로 한다.


성의 입구는 마치 레고로 만든 것 같이 귀여운 성이다. 성 안은 현대 작가의 설치미술을 볼 수 있는 전시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이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퍼즐과 미술 용품도 마련되어 있어서 아이들과 한동안 재미있게 놀았다.

레고 블록으로 지은 것 같은 안시성 정문
성에서 내려다본 안시성과 호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곳에 미리 예약해둔 에어비앤비 숙소가 며칠 전 취소가 되었다.  그래서 오늘 어디서 묵을지가 아직 미정이다. 동네를 돌아보고 천천히 정하기로 한다. 이쯤 되니 이제 배짱이 생긴 것일까? 당일 날도 얼마든지 숙소를 구할 수 있다는 경험에서 나온 힘이겠다. 두려움은 상상 속에서 괴물이 되고, 햇빛 쨍쨍한 날에 나와 맞닥 뜨리면 빛과 함께 사라지는 것 같다.






성을 구경하고 마을로 내려왔다. 베니스를 연상케 하는 수로와 작은 다리가 마을 한 복판에 있다. 수로 양옆으로는 예쁜 식당과 상가들이 마음을 설레게 하는 로맨틱한 곳이다. 수로에는 블랙스완들이 무척이나 여유롭고 우아하게 앉아있다. 마을 어디를 보아도 바로 아름다운 그림이 되는 곳이다.


베니스가 생각나는 수로





수로는 곧바로 커다란 Annecy 호수로 이어졌다. 투명한 옥색 물빛과 호수를 둘러싼 화강암 산과 나무들 그리고 하얀 솜사탕 같은 구름이 아름다웠다.  물속은 투명하게 들여다보인다. 호수 위에는 작은 보트를 타는 사람들, 제법 큰 유람선을 타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이 왜 안시가 아름답다고 입을 모아 칭송했는지 이해가 간다.


이곳 역시 누가 봐도 관광이 주요 수입원인 멋진 자연환경을 품은 축복받은 곳이다.




파스텔처럼 예쁜 물빛






어느새 점심때가 되어 마을로 돌아와 아시아 요리를 검색해 보았다. 다행히 일식당이 있어서 찾아갔으나, 지금은 영업시간이 아니다. 종종 아시아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구글맵에는 분명 영업시간 중인데, 막상 가보면 영업을 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낮의 태양으로 지쳐가는 아이들을 위해 근처의 적당해 보이는 식당으로 가서 먹기로 했다. 전형적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이다. 딸과 나는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아들을 위해 어린이 세트를 주문했다.  14유로나 하는 어린이 세트메뉴인데 냉동실 구석에서 꺼낸듯한 생선 조각 몇 개와 감자칩을 내놓았다. 정말 성의가 없어 보였다. 그런 날이 있다. 뭔가 한 가지 일로 기분이 상하면 아무리 애써도 회복이 잘 되지 않는 날말이다. 무엇보다 누가 봐도 무성의한 접시의 상태를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여주인의 태도가 거슬렸나 보다.


식당에서 기분이 살짝 좋지 않아 져서인지 숙소를 검색하고 싶은 의욕이 사라지고 말았다.  원래 내일 가기로 한 브장송으로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오늘 이동해서 내일 아침부터 편안하게 그곳을 탐험하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되었다.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생긴다고 했던가? 구글맵에 따르면 좌회전을 해야 하는 지점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좌회전이 불가능한 곳이다. 첫 번째 이 지점에 와서는 당황해서 우회전하여 다시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두 번째 와서는 내가 첫 번째 와서 보지 못한 것이 있는지 더 세심하게 살펴보았지만 마찬가지 상황임을 깨닫고 다시 한번 우회전하여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이런 때 나를 괴롭히는 내 안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온다. 내 마음 한켠에는 내가 미치지 못할 특정한 유형의 유능한 젊은 아빠 상이 있다. 당장 내가 그런 유형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헤매는 거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떠들기 시작한다.


걱정이 몰려왔다. 도로 한편에 차를 세우고 구글 맵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분명 그 자리에서 좌회전을 하라고 한다. 스위스를 경유하는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어디선가 스위스 고속 도로를 이용할 때 통행 패스가 필요하며, 통행 패스 없이 다니면 벌금을 많이 내야 한다고도 본 것 같다. 그래도 별다른 대안이 없으니 일단 스위스를 지나쳐 가는 고속도로를 타기로 했다.


다행히 중간에 통행 패스를 검사하는 곳은 없었다.








세 시간을 달려 무사히 브장송에 도착하니 벌써 해가 어둑해졌다.


호텔이 올드 타운 구역 내에 있어서 마을 내로 진입하려고 하는데 도로 한가운데에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다. 이런 곳은 처음이라 당황스럽지만 인터폰으로 통화를 시도했다. 호텔이 마을 안에 있다고 하니 바로 차단기를 올려준다.


오늘은 정말 일진이 좋지 않은 날인가 보다. 예약한 호텔에 도착하니 호텔에는 주차 공간이 없으므로 500미터 떨어진 곳에 주차를 하고 오라는 것이다. 먼길을 오느라 피곤한데 번거롭게 주차를 별도 주차장에 하고 와야 한다 하니 정말 힘이 빠졌다. 필요한 짐을 방에 들여놓고 아이들은 쉬도록 했다. 주차장을 찾아가서 주차를 하고 호텔까지 걸어왔다.


호텔에 돌아와서 보니 아직 호텔 주차장에는 빈자리가 있었다. 리셉션의 여자 직원에게 따져 물었다. 분명히 빈자리가 있는데 왜 다른 곳까지 가도록 했느냐고. 그 직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자리가 비었는지 몰랐다고 말했다. 내일은 이곳에 주차를 하겠으니 자리를 확보해달라고 말했다. 나의 기세에 눌렸는지 못마땅한 얼굴로 알겠다고 했다.




어쩌면 여행은 비싼 돈 내고 귀한 시간 들여서 받는 훈련인 것도 같다. 마음을 다스리고 안 좋은 기분을 빨리 털어내는 마음 훈련 같은 것 말이다. 특히 아이들에게 이런 기분이 물들까 봐 심호흡하고 다시 마음을 밝게 만들어본다.


새로운 곳 찾아가기 좋아하는 나는 또 생전 처음 발을 딛는 브장송 올드 타운의 야경과 밝은 달빛에 설렌다. 이 곳은 어떤 곳일까? 근처 태국 식당에서 볶음밥과 볶음 국수로 오늘의 탄수화물을 채우니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행복한 여행자 모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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