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의 깊이와 견고함에 대하여
학부모와 상담하다 보면 아이의 낮은 성적에 대해 이렇게 분석합니다.
"아이가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나요?"
'개념을 온전히 이해한다.'
사람을 가르치는 일은 매우 복잡한 문제들이 뒤엉켜있고 다양한 인과율을 포함하고 있기에 이렇게 단순한 진단으로 솔루션을 얻을 수 없습니다.
2000년 전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당신은 왜 천둥, 번개가 치는지 아느냐? 이해할 수 있냐?"
물어보면 뭐라 할까요?
"당연히 알지! 천둥과 번개는 제우스가 화가 나서 물건을 마구 집어던지는 거야"
300년 전. 피뢰침을 발명한
벤자민 프랭클린은 천둥과 번개가 발생하는 이유는 구름 입자의 양전하와 음전하의 갯수를 맞추기 위한 방전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이 천둥과 번개가 발생하는 이유에 대한 온전한 이해인가요?
현대 양자물리학자들은 이것은 자연현상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아니라고 반박합니다. 천둥과 번개가 발생하는 이유는 대기에서 전자의 이온화 과정을 통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묻고 싶습니다. 이제 천둥과 번개가 발생하는 원인을 온전한 이해할 수 있는 건가요?
학생들한테 '이해했니?'라고 묻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생각해 볼 만합니다. 실제로 이해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한 학생의 거꾸로 설명을 들어보면 제멋대로 해석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일단 이해했다는 '이해' 맞습니다. 나름의 이해입니다.
(요즘 설명 후에 "이해됐니?"라고 묻는 대신 "정리할 수 있겠니?"라는 질문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이해에 대한 깊이만큼 견고함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합니다.
오답을 고치고 수학 공부가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공부는 이제 시작입니다.
공부는 이해했다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끝이 아닙니다.
풀이는 이해했는데, 이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리로 이해한 것을 손이 기억하도록 남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희미한 이해의 조각들을 단단한 매듭으로 엮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답정리하며 다양한 각도로 문제를 관찰하며 내 생각의 코드에 맞추거나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접근이라면 새로운 연결 코드를 심어야 합니다.
초등과정은 최상위수학을 새 책으로 재독합니다.
한번 풀었던 문제들을 다시 풀어보는 재독을 통해서 생각이 견고해집니다.
이것은 곰국이 우려지는 순간입니다.
수학은 토론이 가장 유익한 과목입니다.
안타깝게도 답이 있고 풀이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수학은 토론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토론은 우리의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와 연관시키는 과정입니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와 동화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스키마를 확장하며, 우리의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함으로써 그들의 스키마에 우리의 아이디어를 동화할 수 있게 해줍니다. 수학적인 언어는 반드시 자신의 언어로 재생산되어 되풀이되어야 합니다. 타인의 표현을 듣고 이해하고자 노력할 때 스키마가 커지고 사고가 유연해집니다. 듣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것은 이해의 너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