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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리영 Feb 22. 2021

슬픔이 흩어지지 않도록,

백상현의『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를 읽고

슬픔에 대해서 생각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슬픔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때로는 그 슬픔이 나에게 매우 가까운 것이 되기도, 혹은 나의 것이 되기도 한다. 슬픔은 이렇게 만연한데 나는 슬픔에 대해서 얼마만큼 인식하고 있을까.     


속지 않는 자들이 헤맨다Les non-dupes errent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위고, 2017

라캉은 이 문장을 통해 철학의 목표를 이야기 했지만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의 저자 백상현 박사는 라캉의 문장을 빌려 유가족의 슬픔을 이야기한다. 나는 이 책을 ‘슬픔을 말함으로서, 슬픔이 흩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참사 이후 슬픔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유가족이 경험한 것은, 적당한 수준으로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었던 정의의 민낯이다. 믿고 있던 정의가 사라지면서 알량한 진리를 잃고 유가족은 방황하고 헤매는 자들이 된다.     

슬픔 다음에는 조난이 온다. 누군가 진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진리의 상실을 슬퍼하기 시작했다면 그는 이미 길을 잃고 방황을 시작한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슬픔을 야기한 세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기에, 세계 속 그의 존재와 일상은 의미를 잃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속으로 추락한다.     
백상현,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中     


철학은 조난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방황하는 자들의 마음을 치유하지 않을 것이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의 임무는 조난당한 삶을 조난당하기 이전의 삶으로 되돌리는 것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백상현,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中     


박상현 박사가 라캉의 말을 끄집어와 책의 제목으로 정한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방황하는 자들의 목표(=철학의 목표)는 슬픔을 잊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방황하는 자들 목표는 방황하는 것에 있다. 헤매는 것에 있다. 애도하지 않고 슬픔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서 슬픔이 흩어지지 않도록, 그리하여 기억이 소멸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있다. 


박상현 박사는 이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유가족)은 눈물을 무기로 싸우고 있었다. 그렇게 수백 일의 시간이 흘렀고 이제야 우리는 그들이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된다.”고.


슬픔은 왜 흩어지지 않아야 하는 걸까. 왜 기억은 소멸되지 않아야 할까. 그들은 왜 눈물을 무기로 싸우고, 수백 일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할까. 그것은 우리 세계에는 아직 진리의 상실을 표현할 정당한 언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슬픔을 유지한 채로 방황할 수밖에 없다. 애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이것에 대해서 박상현 박사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애도의 작업이란 우리가 상실한 것에 정당한 이름을 부여하려는 가장 진실한 투쟁의 형식”이라고.


나는 슬픔과 애도를 유사한 감정이라고만 생각해왔다. 두 감정이 다르지 않다고 믿었기에 그들이 애도하지 않고 슬픔에 머물러 있는 것에 의아해했다. 하지만 두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봤을 때 너무나 다른 것임을 알게 되었다. 슬픔을 말하자면 상실로 인하여 새겨진 상처의 마음 상태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존왕』에서는 콘스탄스가 어린 아들을 잃은 슬픔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슬픔은 떠나간 아이의 빈방을 채우고,
아이의 침대에 눕고, 나와 함께 서성거리고,
아이의 귀여운 표정을 짓고,
아이가 하던 말을 흉내 내어 말하고,
아이의 사랑스럽던 몸 구석구석을 떠올려주고,


아이의 형상이 되어 주인 잃은 아이의 옷을 걸치네.      
셰익스피어, 『존왕』 中     


『존왕』에서 표현하는 것처럼 슬픔이란 상실된 것의 빈자리를 처절하게 느끼는 감정, 서늘한 공백을 마주하는 고통이다. 반면 애도는 슬픔을 끝내기 위한 작업이라는 점에서 슬픔과는 다르다. 슬픔의 지속이 아니라 슬픔을 종결을 목적으로 한다는 지점에서 다른 것이다. 때문에 애도는 슬픔의 감정을 언어로 사로잡고 상징화하는데 집중하려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애도는 상실한 것에 정당한 이름을 부여하려는 투쟁”이기 때문이다.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인식이 곧 위로라는 것」 中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위로에 대해서 설명하며 정확한 인식은 위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신형철의 문장에 기대어, 다음의 문장 또한 성립한다고 믿는다. 이해와 인식이란 곧 정확한 앎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정확히 알지 못하는 무엇은 그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다고. 정확한 앎 없이는 영원히 방황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나는 슬픔에 대해서 생각한다. 도처에 널려 있는 많은 슬픔 가운데, 언제까지나 흩어지지 않을 슬픔에 대해서 생각한다. 언제까지나 애도를 거부하는 슬픔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흩어지고 애도되어야만 할 슬픔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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