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암탉과 병아리들>과 <수탉>을 살펴보며
미술美術의 아름다움이라는 막연함은 무의식중에 내재되어 있다. 현대는 다양성을 추구하고, 그 다양성에는 아름다움 또한 포함되기 때문에, 아름다움의 기준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따라서 아름답다라는 개념 자체가 무색할 만큼 확장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미술, 그리고 다양한 미술을 통한 다양한 아름다움이 피어나고 있다.
미술은 예전으로부터 기록, 숭배, 사실. 추상, 종교, 인상, 현실, 모던, 초현실, 개념 등을 거쳐 얼핏 본다면 다른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점점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본다면, 결국 미술이란 같은 것을 전달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미술의 본질과 전달에 대해서, 피카소의 <암닭과 병아리들>과 <수탉>을 통해 말하고자 한다.
먼저 <암탉과 병아리들>을 본다면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내지는 않았지만 그림에 담아내려고 했던 현실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상상이 된다.
암탉과 병아리들, 그리고 암탉의 뽀송뽀송한 털은 손을 대어 만져본다면 빵처럼 눌러질 것만 같이 현실감이 있다. 부드럽지만 때로는 뻣뻣한 닭털이 느껴질 것만 같다. 그리고 병아리와 같이 그려짐으로써, 그 털의 부드러움에는 어미의 모성애나, 따뜻한 따위의 감정 따위가 전달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그림을 보면서 전달되는 것이란, 그냥 그런 것들이다. 암탉, 그 이름에 걸려있는 표면적인 것들. 딱. 그것까지. 암탉은 그저 암탉을 표현하는데 멈추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암탉을 그려낸 그림이니까. 암탉다운 암탉 그림일 뿐이다.
반면에 나는 <수탉>을 보고 있을 때면 조금 다른 생각. 아니, 조금 더 깊은 생각. 조금 더 겉면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본질에 대한 생각이다.
<수탉>은 <암탉과 병아리들>에 비교하자면 조금 더 사실적이지 않다. 아니, 조금 표현을 달리해야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수탉은 사실과는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눈에 보이는 사실과는 다르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현실적이지 못한가? 나는 감히 단언할 수 있다. 아니다.
사실과 다르게 그린다고 해서 현실성이 떨어질 수는 있지만, 오히려 현실성이 높아질 수도 있다. 나는 피카소가 그려낸 수탉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실은, 마찬가지로 피카소가 그려낸 <암탉과 병아리들>과 비교했을 때 더욱 극대화되어서 나타난다.
<수탉>, 이 그림을 본다면 나는 렘브란트가 적당한 목탄으로 아주 적당히 그려낸 <코끼리>가 떠오르고는 한다.
두 그림의 공통점은 대상의 본질이 되는 특징을 잡아내서 그것을 중점으로 표현해냈다는 것에 있다. 렘브란트의 <코끼리>에는 이러한 특징이 아주 잘 드러난다. 이것을 보면서 어떤 사람이 코끼리의 세부묘사가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부묘사로 종이를 가득 채우지는 않았지만, 렘브란트는 목탄으로 그어낸 몇 가닥의 주름진 피부를 통해 코끼리를 누구보다 현실적으로 표현해냈다. 그리고 이는 <수탉> 또한 마찬가지이다.
<수탉>은 <암탉과 병아리들>은 물론이고 렘브란트의 <코끼리>보다 사실과는 다르게 그려졌다. 실제 수탉을 보고 그렸다기보다는 수탉에 대한 개념을 보고 그려냈고 그 결과 수탉의 본질을 누구보다 잘 담아냈다.
수탉의 멍청함, 무분별한 공격성, 우둔함, 그리고 당장에라도 소리를 지르고 달려들 것만 같은 생동감이 전달된다. 그야말로 수탉의 느낌이 든다. 이러한 느낌은 실제 수탉을 본다고 해도 쉽게 느끼지 못하는 수탉의 본질이다. 아주 오랫동안 수탉을 보고, 알고, 닿았을 때 느낄 수 있는 수탉의 본질. 그 어떤, 그 누구의 수탉 그림이 이렇게 수탉을 잘 담아낼 수 있을까?
<암탉과 병아리들>과 같이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것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한다. 뒤러의 <산토끼>를 본다면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얼마나 많은 집중력과 노력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감히 짐작조차 어려울 것만 같다.
하지만 어떻게 본다면, 사실적이라는 것은 그 순간만을 담아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단면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현실성을 높게 담아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본질이란 결코 순간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순간을 담아내는 사실적 묘사에서는 필연적으로 현실을 일부 결여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시대가 나아가고, 기술이 발달하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더더욱 많은 사실을 수도 없이 접하면서 살아간다. 눈을 뜨고 눈을 감을 때, 그리고 감지 못하는 귀를 꿈속으로 달래서 잠시 동안의 어둠을 베고 누울 때를 제외하면 끊임이 없다. 사실과 만나고, 부딪히고, 읽고, 듣고, 쓰고, 말하고, 보고, 만진다. 그렇게 수많은 사실에 둘러싸여, 파묻혀버려서 사실이라는 것만을 보고는 더 이상 온전히 그 사실을 전달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즉, 정확한 전달을 받기 위해서는 정확한 것으로는 부족해졌다는 것이다. 사실이란 닳고 닳아 버렸다는 것이다. 온전한 사실을 전해 받기에는 정확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닭을 봄으로 닭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닭을 더 이상 닭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닭의 내재된 본질을 말해야 우리는 비로소 닭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예술이라는, 뉘앙스와 느낌이 중요시해야 해야 하는 분야에서는 또한 거기서 더 더욱이 한 걸음 벗어나야 한다. 더욱 본질에 닿을 수 있는 전달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미술을 포함한 예술은 타자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는 과정이다. 그 방식이 달라지는 것은 각각 시대와 현실에 따라, 더욱 잘 전달하기 위한 도구이자 방편에 불과하다.
사실 미술에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어떤 것도 정답이고 어떤 것도 오답은 아니다. 그저 조금 더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방법을 갈구하는 것이고 서두에서 언급한 다양한 갈래들은 그 갈구의 증거들이다, 그렇기에 사실적이지 않더라도 놀랍도록 현실을 담아내는 작품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피카소의 두 닭(<암탉과 병아리들>과 <수탉>)들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본질과 그 전달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기에 좋은 예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작품을 감상할 때 작가가 담아내고,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생각해본다면 조금 더 명확하게 그 본질을 전달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