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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다 Jun 04. 2022

힘들다는 말

평가받을 용기


미주알고주알 시시때때로 몰려오는 힘든 순간을 빼놓지 않고 친구에게 털어놓았던 시절이 있었다. 들어주는 친구를 붙잡고 몇 시간이나 고문을 당하게 해놓고서는 듣기 힘들어하는 순간이 조금이라도 포착되면 서운해하던 시절.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서 '우리'의 시간보다는 '개인'의 시간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는 어른이 되었다. 사랑하는 친구의 시간을 배려하고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성숙한 자세도 갖게 되었다. 나보다 더 성숙한 친구는 이미 나보다 먼저 실천하며 나를 배려하고 있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그럴수록 힘들다는 말을 잘 안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친구는 기쁘고 행복한 상태인데 내가 무거운 기운을 전파라도 할까 싶은 마음에 웬만하면 혼자 꾹꾹 참고 견디게 된다. 그리고 배우자를 만나고 혼자 꾹꾹 참는 일은 정말 없다. 사실 남편과 사이가 좋으면 친구 없어도 된다고 말하지만, 가끔 친구를 만날 때면 친구 없이 어떻게 사나 싶다. 예전부터 느꼈던 것이긴 했지만 남편이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동성친구가 채워주는 게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있고, 친구가 있고, 남편이 있어도 인간이란 존재는 죽을 때까지 완벽하게 가득 채워지는 상황은 경험하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충분히 채워질 수는 있다고 본다. 그래서 친구가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조금 더 찰랑찰랑거리는 만족을 일시적으로 느낀다. 그 일시적인 감정은 질에 따라서 평생 가기도 한다.

본론으로 들어와서, 친구에게 현실의 고민을 털어놓게 되면 여러 가지 반응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나의 감정을 걱정해 주는 사람, 해결점을 제시해 주며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람, 그리고 나의 상황을 판단하는 사람, 마지막으로 최악은 나의 에피소드를 누군가에게 예시를 들며 전파하는 사람. 나도 가끔 최악인 마지막 예시인 사람이 될 때도 있다. 사실 뉴스나 전해 들은 이야기는 정말 감정적인 동요 없이 누군가에게 예시를 들 때도 있다. 그래서 나의 힘든 이야기를 할 때 나는 내 곁에 있는 친구를 판단하게 되는 고약한 심정까지 겪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그 정도로 복잡한 인간이었다. 나도 안다. 남의 의견, 이야기, 생각 그들은 그들만의 잣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하는 데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나의 환경에 어떠한 판단을 내리든 내가 기분 나빠할 요소가 아니라는 거 잘 안다. 그렇지만 나는 득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때론 배신감과 서운함을 느끼고 친구로 대하지 않는 차단을 하기도 한다. 사람은 변한다. 본성은 변하지 않지만 시시각각 기분이 요동친다. 상황에 따라 희로애락에 헤엄치며 산다. 그래서 가끔은 나 그때 힘들다고 말했는데 많이 괜찮아졌다고 다시 알려야 할까? 싶은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물론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고민을 나누었던 친구라면 나를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괜찮다고 신경 써주어서 고맙다고 팔로업을 하기는 한다만, 앞에 들었던 예시는 나를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싶은 못난 노파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마음. 내가 제하고 싶은 것은 그런 마음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잘 안다고 확신하지만 나 왜 그렇게 힘들어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은 걸까? 그건 내가 힘들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불행한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히고 싶지 않다는 것이 내가 살면서 제일로 꼽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행복이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을 하면서 행복에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행복의 찰나를 공공연하게 떠벌리고 알리는 게 아닐까. 아무도 보지 않는 일기장은 자기혐오도 자주 일삼는데 말이다. 나는 조금 더 많이 성장할 필요가 있다. 나의 상처를 나의 힘든 상태를 건강하게 이야기 나누고 그 건강한 대화 속에서 치유받고 타인에게 평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평가받기 위해 나의 힘든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내뱉는 모든 말들은 타인에게 판단 내려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나는 필요하다. 책, 그림, 드라마 또는 영화처럼 창작자의 의도와 달리 세상에 나왔을 때는 보는 이들의 소유가 되는 것처럼 나의 말과 행동, 생각도 필연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소유가 된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나는 조금 더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군다는 말은 많이 성숙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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