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현 Nov 20. 2022

어른 보호구역

과학과 에세이

딸과 아들로서의 역할. 남자와 여자로서의 역할. 친구이자 연인으로서의 역할. 후배에서 선배로서의 역할. 청년 혹은 중년으로서의 역할. 자식인 동시에 부모로서의 역할. 직원 또는 팀장으로서의 역할. 학생, 아니면 사회인과 소시민으로서의 역할. 생태계 구성원이자 행성의 일원으로서의 역할. 태양계와 우리 은하, 나아가 우주 속 미물이자 먼지로서의 역할까지. 어림하기도 벅찬 여러 역할들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간다. 하나만 해내기도 벅찬데, 떠올려보면 참 많은 역할과 책임을 요한다. 그저 차근차근 순서에 맞춰 살아왔을 뿐인데.


나를 칭하는 명칭의 가변성에 때로는 어색하기도 하고, 어쩔 땐 야속하기도 하다. 구태여 의식하지 않았지만, 돌아보면 내게 씌워진 이름과 호칭, 역할과 책임이 언제 이렇게 불어났나 싶었다. 내가 해내야 할 것들이 이리도 많았나 싶었다. 역할과 책임, 임무와 구실이 불어갈수록 참아야 할 것들은 점점 늘어만 간다. 눈물을 참고 감정을 숨기며 아픔을 미뤄간다. 어른이었다.


현재 나에게만 주어진 어른으로서의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 세상 무이한 존재로서 나에게만 주어진 임무를 잘 해내고 있긴 한 걸까. 걱정이 든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해나가고 있나 싶고. 나는 여전히 아이 같은데, 툭하면 내면의 어린 감정이 튀어나오는데, 다들 어떻게 그리 의연하게도 지낼까 싶다. 그래서 한때는 많이도 묻고 다녔다. 어떻게 하면 어른이 되는지를. 하지만 명쾌한 답은 없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했던 것도 있었다. 다들 어른인 척하는. 별반 다를 것 없이 여린 사람들이라는 것을.


어린이 보호구역, 장애인 보호구역, 노약자 보호구역. 하물며 야생동물에게도 보호구역이 있는데, 와중에 어느 곳에도 끼지 못하는 어른들이다. 약자의 반대말은 강자가 아닐 테지만, 덜 약하다는 이유로 강함을 버텨야 하는 존재들이 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받아들이는 의무가 있다. 더 이상 약하면 안 된다는 말. 약하지 않은 게 아니라 약한 척을 못하는 것뿐인데. 약자도, 강자도 아닌 그저 버텨내는 자들인데. 버텨내는 자에겐 쉼터도 필요한 법이지만, 세상은 더 이상 다 커버린 어른을 지켜주지 않는다.


가끔은 어른 보호구역을 상상한다. 짓누르는 역할을 죄다 내려놓은 채로 활짝 웃는 어른들이 모인 공간을. 가끔은 보호받던 시절도 떠올린다. 지나다니는 차를 막아주던 녹색 어머니회와 차량 제한 속도, 그리고 많은 안내판. 어린 나를 지켜주던 공간들. 지금도 여전히 보호받고 싶은 순간이 들이닥치니까, 그런 노스탤지어를 꺼내 본다. 옛날 사진을 뒤적거리며, 아이 때 짓던 미소를 따라서 살며시 지어 본다. 어른을 보호하는 구역은 없지만, 잠시나마 아이가 되어 본다면 보호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아이처럼 웃을 수 있는 공간. 그런 소중한 사람들이 모인 곳. 아이처럼 서로의 약함을 나눌 수 있는 어린 어른들. 잠깐이라도 어린 사람이 되는 걸 허락받을 수 있을 때, 어른은 그제야 보호받을 수 있나 보다. 그러니 자꾸만 유치함을 드러내더라도,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공간 속으로 들어가곤 한다. 잠시나마 역할을 내려놓고,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 어른들은 그렇게 서로를 지켜낸다.

작가의 이전글 3도 화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