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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 Nov 25. 2022

입자가 되어

과학과 에세이

친구가 떠났다. 분명 2주 전 본 얼굴인데, 어느새 사진 속으로 들어가 시간을 멈춰버린 웃음이었다. 그 모습에 얼마 전까진 눈에 불을 켜고 한끝이라도 아껴보려던, 조금이라도 더 벌어보려던 숫자의 색채가 옅어졌다. 모노톤으로 물이 빠졌다. 일순 찾아오는 덧없음인가 보다 했다. 때로는 다소 아프기도 하고 꽤나 아리기도 하겠지만, 남은 이들에겐 사사로운 단상과는 별개로 아무렇지 않은 내일이 찾아온다. 그런 공간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내고 살아가야 하니까, 들이켠 물 한 잔과 함께 밀려올 감정들을 애써 삼켜낸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덜컥 찾아온 무연함을 마주한다. 내겐 종교를 향한 태생적 방어기제가 있는지, 그 많은 종교 중 어느 걸 에둘러봐도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누군가를 보내거나 망자를 기리는 데 그만한 왕도도 없다는데 말이다. 그래서 되려 이성이란 미명 하에 설익은 상상을 해 본다. 모든 건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론으로부터. 물건도, 자연돛 사람도. 무량한 공간으로부터 뭉쳐져 생명이란 찰나를 이루다가, 다시 무한한 곳으로 퍼져나갈 뿐인 미립자라면서. 사후도, 윤회도 아닌 그저 영원한 흩어짐을 또다시 향유하는 조각들이라고.


한군데에 밀도 있게 뭉쳐있던 한 방울도 웅덩이에 빠진 후엔 섞여든다. 전체의 일부가 된다. 일부는 그렇게 전체에 포함되기 마련이다. 자연의 섭리는 늘 균일한 흩어짐을 종용한다. 그러니 입자가 잠깐 뭉쳐졌다 입자로 되돌아가 퍼져나가는 모습을 그려본다. 일부는 지구에 남아 지천을 이루고, 일부는 이웃 은하로 넘어가 천체가 되는 장면을. 내가 모르는 곳으로, 관측할 수 없는 저너머의 어둠으로 균등하게 퍼져나가는 광경을.


떠난 사람에게 구태여 이유를 캐고 싶진 않다. 대신 문득 불어온 바람에 섞인 입자를 한 번 느껴본다. 불현듯 올려다본 별자리에서 흔적을 찾아낸다. 마찰로서 체온을 이뤄주던 입자의 온기를 체감한다. 그때 조용히 맞이하면 될 일이다. 맞이가 서로 다르듯이, 보냄에도 각자의 방식이 있다. 처음이 그러했듯, 끝인사 또한 내가 믿는 방식으로 맺는다. 그래서 느닷없는 상상을 좋아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떠난 이는 남겨진 이에게 삶을 선물한다. 지금 내쉬는 호흡의 깊이를, 주변을 감싼 공기의 온습도가 주는 쾌감 혹은 불쾌감을, 흙길이 축축하게 습기를 머금어 형성한 진득한 촉감을, 반복되는 일상이 빚는 지루함마저 곧 평온함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당연함이란 껍질에 가려졌던 알맹이를 남긴다. 그러니 떠난 이가 남긴 온기를 받아 이으며, 일상을 이어낸다. 그 속엔 분명 떠난 이의 한 부분도 녹아있을 테니 황망해하진 않는다. 그리움이 다가오면 남겨진 당연함들에 또 한 차례 집중해본다. 콧속 깊이 들어오는 숨을 크게 내쉬고, 바람의 서늘한 질감을 살피고, 하늘의 만연한 색감을 바라본다. 삼라만상에 깃든 한 사람의 입자들을 의식한다. 이따금 찾아올 시큰함도 그렇게 상상력으로 덮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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