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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 Dec 02. 2022

세포, 배터리, 픽셀

과학과 에세이

익숙함은 편안한 색안경을 씌운다. 때문에 가끔은 억지스런 불편도 느껴낼 필요가 있다. 몸은 점차 편안함을 추구하고, 뇌는 자꾸만 익숙함을 권려한다. 익숙한 행동, 낯익은 생각, 편안한 시선은 에너지 소모가 적다. 생존에 유리하단 뜻이다. 우리가 의지하는 몸의 부품들은 여느 때나 그렇게 항상성을 따른다, 자연스레. 체온은 언제나 36.5라는 숫자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하듯이, 한 번 굳어진 인식들에겐 이윽고 틀에 갇힌 그림자가 드리운다. 익숙함은 이내 고정관념을 짓는다.


cell이란 단어는 여러 뜻을 내포한다. 수능을 준비할 땐 생명과학 공부에 각고하다 보니 그 시절의 단어는 응당 세포이기만 했다. 그러다 대학에선 공학을 배워야 했고, 이후엔 배터리를 뜻하는 데 익숙해져 갔다. 나중엔 내가 내뱉던 cell에는 배터리 셀만 담겨있었다. 컴퓨터를 자주 만지는 사람에겐 픽셀로 은유되기도 하고, 하물며 감옥이란 의미도 지녔다. 이렇듯 각자에게 맞는 편안함과 익숙함에 따라, 서로에게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맞추어, 동일한 단어 하나일지라도 위시하는 뜻과 해석이 갈라져나간다.


사실 따져보면 웬만한 건 그런 식이다. 현상은 하난데, 시각은 다르니까 같은 걸 봐도 속에 담긴 의미가 혼용되곤 한다. 비단 단어 하나만으로도 떠올리는 모습이 이렇게나 갈라지는데, 여러 현상이 뒤섞이고 포진해대는 사회로 나가면 갈래길이 한층 심화된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여 툭하면 서로가 갈라지고, 갈라진 간격 사이에서 편가름이 태어난다. 반목하고 대립한다. 시각이 다르단 이유만으로 진의가 곡해되고 함의마저 왜곡된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이런 약한 면모를 이미 다 파악이라도 한 건지, 각자의 익숙함이 낳은 틈새를 집요히도 파고든다. 원하는 것만 들려주고 익숙한 내용으로 눈을 가린다. 확증편향은 그렇게 알 듯 말 듯 커져만 간다.


언제나 같음을, 일정을 유지하려는 항등 현상이 아무리 개인의 생존에 유리할지라도, 여럿이 모여서 소리를 내야 하는 순간엔 유해한 태도다. 사고관은 모두 달라도, 가치관이 저마다 정합하지 않아도 뚜렷한 것이 있다. 모두의 목적지는 하나라는 사실이다. 조금 더 나은 세상, 행복함과 따뜻함이 퍼져나가 만성적이던 소외가 줄어들기를 모두가 온당 바랄 뿐이다. 그러니 여태 의지해오던 익숙함과 편안함, 능숙하고 너끈한 시선을 과감히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불편함을 짊어진 채로 때론 반대편에서 서볼 줄도 알아야 한다. 익숙함의 색안경을 벗어낼 때, 다방면의 고운 심상들이 얼기설기 섞여 곳곳으로 저며들기 시작할 테다. 저며든 심상을 따라 훈풍도 얼마간 더 불어올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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