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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 Jan 06. 2024

결과로 말하는 세상이기에

세상 뭐든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건 자명한 일이지만, 실패의 순간은 여느 때나 익숙해지지 않는다. 사사로운 실패 한 번 한 번이 이따금 쓰나미처럼 크게 다가오기도 한다. 다년간 준비한 시험에 죽을 쑤기도 하는가 하면 야심 차게 지원한 선망의 직장에서 야멸차게 낙방하기도 한다.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다가섰다 거절당한 기억이나 급하게 탄 택시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도 않는 사소한 좌절까지도. 지금껏 그랬고 아마 앞으로도 평생 가까워지지 못할 감각. 크고 작은 낙망의 순간이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내 미래의 일부와 함께하리란 건, 그닥 내키지 않아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 때가 있고 연이 있단다. 운과 명이 합일되는 게 생에 몇 가지 정해져 있단다. 그러니 늘상 기다려 보라는 답변만이 되돌아온다. 허나 결과가 모든 걸 대변하는데, 실패의 순간마다 어떻게 무념할 수 있을까. 과정은 생략되고 남는 건 오로지 가시적인 흔적들인데. 명함, 직책, 신분, 지위, 계급, 성적, 그리고 결과. 사람의 색채를 지우고 공산품처럼 번호를 매기는 것들. 인생 절반 이상을 좇으며 살아왔고, 여생 반절은 또다시 뒤쫓아야 할 것들. 그런 환경에서 배우고 듣고 자라왔으니, 실패 한 번 한 번이 너무나도 크게 다가오는 건 어쩌면 당연지사일 테다. 웃사람의 뻔한 위로에 언제나 가시 돋친 반항심을 갖게 되는 것 또한 가당한 일이다. 지나면 다 알게 된다지만, 알게 된들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당장의 아픔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근소한 차이로 떨어진 시험 결과는 수년 전의 일임에도 여전히 아른거리며 현생에 영향을 미치는데 말이다.


조금만 살아봐도 쉽게 알아차린다. 생에 거쳐 간 곳은 ‘무슨 출신’이라는 꼬리표로 뒤꽁무니를 평생 따라다닌단 걸. 선택 하나하나에 두려움이 가득한 이유도 다름없다. 혹여나 섣부른 판단으로 실패라는 낙인이 생길까, 아니면 낙오라는 외투로 인해 내면의 가치가 묵살당하고 절하될까 봐. 선택을 통해 남겨진 멍에는 온몸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곳에 들러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탄생 국가와 출생 지역에 출신 족벌까지, 하물며 선택이 불가한 곳마저 흔적이 남는다. 지위재가 모든 논리를 압도하는데 불확실한 미래 대신 안정적인 현재를 갈구하는 사람들을 쉽사리 탓할 수 있을까. 한두 번의 미끄러짐으로도 앞으로의 여생이 결정될 거라는 동조압력은 어느새 하나의 문화로 자리매김했다.


이렇듯 결과로 말하는 세상이니까 그간의 패사(敗事)가 더욱 쓰라리다. 결과로 대변되는 세상이라기에, 실패와 좌절의 기억들은 지난 과거 곳곳에 남아 앞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실패라는 음습한 저항이 옷에 튄 오물마냥 더럿 묻어 부정의 감정을 재생산한다. 두려움이나 불안, 혹은 절망과 좌절. 앞을 나아가려고 하면 부정의 감정이 즉시 상기되어 발걸음을 붙잡는다. 허나 그런 과정이 축적되면서 몸은 저항적 요소들에 일면 적응되어 가는 중이다. 저항 없는 회로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의 맹목적인 질주를 닮는다. 저항이 빚는 반작용에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했지만, 숨을 고르고 다시 나아가게 한 동력 또한 그곳에서 나오는 법이다. 흐름을 방해하는 동시에 조력하는 모순적인 힘. 일량의 저항은 전류에게 필수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소리, 지나간 건 다 자산이 된다는 얘기, 또는 외투만 달리 입은 채 고민 없이 건네어 가닿지 못한 어설픈 낱말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앞서 만치 단상 위에 올라선 자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건네는 위로의 얇은 부피감을. 혹은 숙려가 결여된 채 흩날려진 격려의 얕은 밀도감을. 힘내라는 말이 빛바래는 이유 또한 같은 선에 놓이는 게 아닐까. 허울 좋은 그 말에는 내면의 저항을 보듬는 힘이 없다. 울림은 저항적 요소를 인정하고 실패의 역사룰 존중할 때 담긴다. 전락과 하락이 앞날을 더욱 단단하게 할 것이란 의미를 내포할 때야 발한다. 여물지 못한 수사어의 반복보다 깊이 있는 한마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낸 사람들은, 그제서야 조심스럽고 어렵사리 운을 떼는 법이다.


많이 긁히고 짓눌린 자리엔 굳은살이 남는다. 사람마다 굳은살의 모양도 위치도 크기도 깊이도 제각기 다르다. 그럼에도 굳은살의 존재는 평등하다. 굳은살이 부재한 경우는 전무하다. 행복해 보여도 불운하고, 불행해 보여도 다복한 게 사람들의 진면이다. 저마다의 결여나 결핍을 안고 살아가기에 절대 채워지지 않는 공동(空洞)이 한 켠에 자리한다. 그럼에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지워내고 씻어낼 수 없는 흉터투성이일지라도, 상흔으로 내밀해진다는 사실을 아는 사연 많은 사람들. 상처 많고 상반 짙은 사람에 끌리는 이유 또한 그곳에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살아낸, 그들의 심지 굳은 저항을 믿으니까. 그곳에서 서로의 나약함을 보듬고 단단해진 현재를 인정해 주니까. 결과로 말하는 세상이지만, 겉면이 모든 걸 대변하는 세상이지만, 저항 가득한 사람의 끌림은 여전히 가볍지 않다. 실패라는 저항적 요소가 삶의 역사 곳곳에 박혀 있단 건 아픈 만큼 굳은살이 짙어진다는 방증이다.


뒤통수에 담긴 표정을 살핀다. 저항이 다분한 사람들은 후면에서도 결연한 의지가 드러난다. 뚜렷한 의지로 살아가는 이의 안광을 숨길 수 없듯이, 살아온 내력이 지어낸 굳은살마냥 각인된 인광이 뒷모습에서도 드러난다. 굳은살은 감내의 흔적이니까. 고통과 통증을 전신으로 내핍하며 얻어내는 훈장이다. 굳어지고 다져지며 그 자리의 통각은 무뎌져 간다. 삶의 단계에서 드리우는 적량의 저항적인 요소들은 그 재료이자 원료가 되어 준다. 저항 없이 순탄하기만 한 삶이 정말 충만할까. 냉수 위에 얹은 버들잎을 보고 방해물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과정을 무탈하게 통과한 소수의 우월자를 초인이라 하지 않는다. 저항에도 나아가는 자를, 그럼에도 지속하는 이를 우리는 비로소 초인으로 받아들인다.


근간 일어났던 대소경중한 낙심의 순간들을 돌아본다. 조금 더 멀리, 낙담의 기억들을 떠올린다. 실패의 물성은 그저 음산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때마다 망연했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절망은 없었으니 말이다. 곳곳에 상처가 아물어 남겨진 굳은 살갗들이 증거가 되어준다. 그렇게 스스로 서사와 편력을 가꾸어 나간다. 타자에겐 보잘것없는 실패의 열거들이 내 생에선 나의 존재를 지탱해 주는 소중한 것들로 자리한다. 여느 누구도 관심 주지 않지만, 나에겐 더 없는 사연과 내력들이니까. 전기(電氣)를 흐르게 하는 회로 속 저항처럼, 전기(傳記)를 써 내려가게 하는 촉매가 되어준다. 결과로 말하는 세상이기에, 난삽한 단어와 비문을 찾아내듯 그간 인지하던 저항의 존재를 다시 이해해 볼 필요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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