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일 아침 해가 쏟았다(sen set).
이제는 배낭은 배낭되로 들고 여행가방을 챙겨야 한다.
어젯밤에 출발을 위하여 체크하여 둔 여행가방을 내가 아닌 아내가 챙기고 있다. 남자보다는 여자가 그러한 부분에는 우월하다. 내가 챙기면 무엇인가 두고 가는 것이 있는데 아내가 챙기면 하나라도 더 있다. 불편하지 않게 3박 4일 여행이 끝나도록 챙겨주는 아내에게 감사할 뿐이다.
단톡방이 움직인다. 가장 멀리 있는 B가 출발을 알린다. 이제 집을 나섰고 지하철역에 도착하였다는 통보다. 다음은 H는 H는 양재역으로 오는 광역버스를 탑승하였고 이동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나는 승용차를 운전하여 양재역으로 이동을 한다. 양재역 서초구청 주차장을 잠시 이용을 하기로 한 만큼 목적지는 서초구청 주차장이다. 주중에 낮시간에 남부순환도로는 교통체증이 없이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하였다. 나의 도착을 알리고 양재역 12번 출구로 나와 서초구청 주차장으로 올 것을 알린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 서로 전화를 알리고 목적지에서 마냥 기다렸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체크하고 있다. 각박해진 세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여유가 없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H가 먼저 도착하였다. 광역버스가 낮시간 교통체증 없이 빠르게 도착하였다고 한다. 지하철은 구파발을 경유하여 서울시내를 관통하여 1시간 30분 이상 소요되지만 버스는 1시간 이내 도착하였다고 좋아한다. 집 앞에서 탑승하여 바로 도착하는 doortodoor가 된 것이다. 교통체증이 없다면 버스가 유리할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가장 가까운 J가 도착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은 도착시간이 명확하니 학교에서도 늦게 도착하고 사무실도 늦게 도착한다. 그것은 아니지만 자동차를 가진 내가 가장 먼저 도착하였고 광역버스를 탄 H가 도착한 후 가장 가까운 J가 도착한 후 지하철을 이용한 B가 도착하였다.
도착한 후 트렁크에 여행가방, 배낭을 채워 넣고 이제 강진으로 이동을 한다. 평일 고속도로는 생각보다 붐비지 않는다. 경부고속도로를 들어선 후 자동차는 4시간 이후에 도착한다는 내비게이션이 알려준다. 평일 고속도로는 화물차가 우리의 역동경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화물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니고 있고 그 옆에 승용차들이 무엇이 바쁜지 그렇게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나는 화물차가 빠르게 지나가는 것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이해한다. 그분들이 역동적인 경제활동 때문에 우리 경제는 역동적인 경제가 되는 것이다.
경부고속도로에서 천안논산고속도로를 들어섰다. 항상 교통체증이 발생하는 풍세 IC에서 정안 IC가 정체다. 나는 이곳의 우회로를 잘 알기에 IC를 벗어나서 국토 43번 국도를 이용하여 정안 IC로 들어선다. 친구들은 왜 출구로 나가느냐 하지만, 내가 자동차를 운전하기에 그냥 달린다. 고속도로를 들어선 후 다시 영덕서산 간 고속도로를 들어섰다가 공주서천 간 고속도로를 들어선 후 서천에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들어섰다.
군산을 지나면 우리는 색다른 맛을 느꼈다. 한국의 동북쪽은 들은 없고 산만 있다. 고개를 쳐들면 산만 보이는 곳에 살았기에 지평선이 보이는 들판을 보고서 놀란 얼굴을 한다. 나도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이런 곳에서 농사를 지었으면 우리 아버지도 기쁘게 농사를 지었을 것이라고 본다. 산골짜기 논에서 하루종일 농사를 짓고 해가 산으로 넘어가면 집으로 들어온 기억이 있다고 옛날을 생각한다. 그때는 별도의 시계도 필요도 없었다고 한다. 산골에서는 해가 산을 넘어가면 이제 일몰이 되고 어둠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김제를 지나면서 멀리 있는 산이 무슨 산인지 확인을 한다. 산을 가면서 주변의 산들이 무엇이 있는지 서로서로 궁금해한다. 고창의 선운산, 방장산, 장성의 축령산 들이 휙휙 지나간다. 어릴 적 사투리를 가지고 옛날을 기억한다. 지금은 거의 사투리는 할머니들 할아버지들만 사용하고 있어서 잘 모르고 있는 사투리가 많았다. 그 사투리를 모아서 보존하였으면 한다. 내가 좀 더 여유를 갖고 이런 사투리를 모아서 인터넷으로 자료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몰이다. 이제 어두워지고 있다. 그 일몰을 차장을 통해서 본다. 해가 떨어지면 달이 뜬다. 영어로는 moon set이다. 그런데, 초승달이다. 초승달이 뜬다고 보아야 할 것인지 모르겠다. 초승달은 아침부터 열심히 달려와서 서쪽하늘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초승달은 태양이 뜨고 난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양을 따라 열심히 가고 있다가 태양이 사라지고 나면 그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인자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일인자가 사라지고 난 다음에야 이인자가 되는 삶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그믐달은 그와 반대다 늦은 밤에 빛을 발하다가 일인자가 나타나면 그 빛을 잃고 존재 감 없이 뒷방 신세가 된 조선시대의 상왕 같은 존재라고 해야 될 것이다.
고민을 한다. 내일 일정이다. 덕룡산이 특별한 의미가 없는데 그리고 주작산을 같이 보지 않고 덕룡산만 보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덕룡산을 이번 여행에서 제외하자는 의견이다. 그리고 2일 차 일정에 있는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1일 차 일정으로 이동시킨다. 여유를 갖고 강진, 해남, 장흥을 둘러보자는 것이다. 덕룡산은 다음에 주작산과 함께 걷데, 안내산악회 버스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월출산 옆을 지난다. 영암아리랑이 생각이 난다. 오래전 하춘화라는 가수가 부른 영암아리랑이 있다. 그 노래가 여수밤바다와 같이 그 지역을 알리는 대표노래가 되어 노래시비까지 있다고 한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영암 고을에 둥근달이 뜬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둥근 둥근달이 뜬다
월출산 천왕봉에 보름달이 뜬다
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에헤야 데헤야 어사와 데야
달 보는 아리랑 님 보는 아리랑
자동차는 서해안 고속도로의 마지막인 목포 톨케이트를 지나고 강진으로 가기 위하여 목포에서 여수로 이동하는 고속도로로 들어선다. 그리고 강진을 들어선다. 강진의 산에는 강진을 알리는 표식이 있다. 상감청자의 모습을 한 형상이 환영한다. 강진청자의 모습을 현대에 재현을 하지는 못하지만 그 청자를 강진의 문화로 우리를 불러들이고 있다. 강진을 8년 전에도 왔었다. 그때는 걸어서 왔다. 아침에 나주에서 출발하여 월출산의 차밭지대를 지나 성진을 지나 밤이 다되어 도착하였는데 더 이상 갈 수 없어 택시를 부른 기억이 있다. 그때 그 택시를 부를 때 강진사람들이 베풀어준 호의는 역시 고마웠다.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다시 다산선생 유배길을 따라 삼남길을 걸었다.
밤에 도착하여 그때는 잠을 청하기 바빴지만 오늘은 자동차를 가지고 왔기에 여유가 있다.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하여야 한다. 산을 가기 위하여 준비를 하여야 한 것이다. 강진읍을 들어가면서 마트가 있어서 마트를 돌아보면서 우리가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고 예약한 숙소로 이동을 하였다. 숙소에 대한 인상은 모습과 프런트의 직원의 대응이라고 할 것이다. 프런트의 모습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단지, 모든 것이 돈이었다.
이곳의 음식을 맛보기로 한 만큼 이웃한 음식점을 찾았다. 이곳의 맛집을 찾은 것이다. 이곳이 고향인 김영랑(윤식)의 대표작인 '모란이 피기까지'를 모태로 한 음식점이다. 당연히 맛집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며, 그 맛집에서 맛을 보고 그 맛을 연장하기 위하여 생가를 찾았지만 늦은 시간이라 굳게 닫혀있다. 시인의 고향에서 시인의 생가는 보지 못하고 시인의 그림자만 보고 돌아섰다.
이제는 다산선생의 다양한 역사를 돌아보기로 한다.
늦은 저녁이지만, 그래도 이곳은 열려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의재(四宜齋)를 찾아간 것이다. 이곳은 강진사람들이 죄인으로 온 다산선생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의(義)롭고 정(情) 많은 주막집 할머니를 만나 이곳에 4년 동안 거주하게 된 것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다산선생은 실의에 빠져 있었지만, 42세 되던 해인 1803년 다산선생은 자신이 머물던 주막의 조그마한 방 한 칸을 공부방으로 만들어 사의재(四宜齋)라는 편액을 걸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의재(四宜齋)란 생각이 맑아야 하고, 외모는 장중해야 하며, 언어는 과묵하고, 행동은 신중해야 한다는 뜻으로, 생각·용모·언어·행동의 네 가지를 의(義)로써 마땅히(宜) 지켜야 한다는 다산선생의 생활철학이 담겨 있다고 한다.
현재 강진군에서는 이곳에 주막을 복원하고 사의재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다산선생은 이곳 사의재(四宜齋), 보은산방, 제자 이청의 집까지 8년의 세월을 보냈고, 다산초당에서 10년을 보냈다고 한다. 사의재로 가는 길은 영랑시인의 생가를 나와 군청, 경찰서 등의 관공서 건물을 지나 골목을 들어가면 나타난다. 사의재라는 이정표를 보고 카메라를 꺼내다가 숙소의 키가 나를 벗어나 버렸다. 나는 그것을 모르고 지나갔다. 그리고 숙소까지 가서 그것을 확인하고 더듬어서 이곳에서 찾았다.
사의재(四宜齋)에 도착하여 어둠 속에 옛날 다산선생을 거두었던 주막할머니 동상과 주막건물을 담고 이웃한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주변에 다양한 시설을 해두고 있다. 한옥체험도 할 수 있게 해 두었다. 강진은 초기에 야박하게 다산선생을 대했지만, 이제는 다산선행을 이용하여 먹거리를 찾고 있다.
숙소로 돌아가는데 강진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싶어서 거리를 들어선다. 강진의 옛 극장이 있던 골목이 있다. 그 골목은 다양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극장은 볼링장이 되고 있고 다방은 카페가 되어 있었다. 영랑시인을 기념하는 사단법인의 사무실도 있고 옛 영화를 그대로 누리기 위하여 골목을 깔끔하게 단장하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왔다. 하지만, 주머니를 뒤져보니 난감하다. 내 주머니에 있어야 할 숙소카드키가 없다. 프런트에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니 비상키를 준다. 하지만, 카드키를 분실하였으니 내일 체크아웃할 때 3만 원을 내라고 한다. 와! 이렇게 비싼가 하면서 내가 걸은 길을 더듬어서 찾으려 간다. J가 동행을 해준다. 외국여행 중에 호텔키는 기념품으로도 많이 가지고 다녔는데 일회용으로도 발급하는데 비싸다. 1만 원 내외라면 이해를 하겠는데 너무 비싸다 하면서 강진시내를 더듬어간다. 강진시내 바닥에 카드키를 찾기 위하여 더듬으면서 명함을 이용한 다양한 광고물을 본다. 저 광고용 명함이 아무 쓸모없이 내일아침 거리에서 소각장으로 갈 것이다.
사의재까지 빠르게 걸어가면서 혹시, 내가 사진을 찍었던 곳을 다시 한번 둘러본다. 사의재 앞에 조성된 누각도 올라가 보고 화장실도 들러보고 사의재 전체를 다시 한번 둘러보고 주막할머니 동상을 다시 한번 본다. 가지고 있으면서 돌려줄 것 같은 할머니 동상은 말이 없다. 다시 거리로 나간다. 사의재 이정표 근처에 흐트러진 종이들이 있다. 이곳저곳을 찾고 있는데 J가 찾았다 한다. 카드키를 찾은 것이다. 이제는 안심이다. 3만 원을 그냥 버리지 않아도 된다.
거리를 헤매고 있는 사이 강진의 하루가 끝나가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1일 차도 이렇게 끝이 나고 있었다. 내일 아침은 어디에서 해결할 것인지 궁금해하면서 내일은 내일 걱정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