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명 Jul 03. 2022

엄마의 고향에서 보내는 여름휴가


“다음 주에 외할머니 보러 갈래?”

엄마의 스케줄에 맞춰 6월 말, 조금 이른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목적지는 대게가 유명한 경상북도 울진군. 엄마가 나고 자란 동네다.


외할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에는 명절마다 울진에 갔다. 경운기를 타고 마을 길로 들어오다 마중 나온 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시던 할아버지의 주름진 얼굴과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그 손길이 지금도 선명하다.

2008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홀로 되신 외할머니께서는 명절마다 고생스럽게 여럿이 움직일 필요 없다며 외삼촌네, 이모네, 그리고 우리 집으로 직접 걸음하셨다. 이에 따라 우리 가족의 외할머니 댁 방문 빈도 역시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친구와 단둘이 떠난 울진 여행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작년 8월, 친구와 여름 휴가지를 고민하던 중 번뜩 할머니 댁이 떠올랐다.

혹시 우리 휴가 다른 곳 말고 우리 할머니 집으로 가는 거 어때?
사람 적고, 근처에 해수욕장도 있고, 민박집 하셔서 방도 많아…!


친구는 아예 처음 가보는 지역이라 너무 좋다며 흔쾌히 승낙했다. 나로서도 약 12년 만의 방문이었다.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에 탑승해 4시간을 내려오니 코로나도 IT도 없는 세상에 도착했다. 별다른 계획 없이 무작정 내려온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주신 할머니는 아니나 다를까 우선 밥부터 먹으라며 푸짐하게 한 상 차려주셨다.


3박 4일 동안 친구와 나는 그날그날 아침마다 지도를 펼쳐 행선지를 정하며 즉흥적인 여행을 즐겼다. 하루는 시내버스를 타고 읍내에 나가 천연기념물인 성류굴을 관람하고 연호정 주변을 산책했다. 또 하루는 해안 스카이레일에 탑승해 멋진 동해바다를 감상하고 '용의 꿈길'이라 불리는 대나무 숲길을 거닐다 등대까지 걸어 올라갔다. 또 다른 하루는 가로등 위에 앉은 까치와 테트라포드 위를 걸어 다니는 아기 고양이에게 인사하고 해수욕장에서 바다멍을 즐겼다.


어릴 적에는 몰랐는데, 울진은 꽤 놀거리가 많은 곳이었다. 명절을 맞이해 방문한 할머니 동네가 아닌, 여행자로서 바라본 울진은 색달랐다. 낯선 듯 낯설지 않은 그 느낌이 퍽 좋았다.


순서대로 죽변바다, 8월의 연호정, 할머니 집 뒷산. 2021. LIFExNICE WEATHER 일회용 카메라



1년 만에 다시 찾은 울진

일정을 조율하지 못한 아빠와 큰언니를 제외하고 엄마, 작은언니, 나 이렇게 셋이서 길을 나섰다. 운전하는 엄마를 위해 나는 조수석에서 쉬지 않고 조잘조잘 말을 걸었다. 작년에 친구와 울진에 갔을 때 생각보다 갈 곳이 많아서 놀랐다고, 왜 어릴 때 한 번도 우리를 데려가지 않았는지 묻자 엄마는 "그러게, 그랬네. 엄마는 친정에 간 거니까 움직이기보다는 쉬고 싶었지."라고 하셨다. 곧바로 엄마의 마음이 이해됐다.

또, 할머니의 민박집은 언제부턴가 손님이 사라진 것 같다고 툭 던진 말에 엄마가 그 역사를 읊어주셨다. 마을 입구 방향에 위치한 아담한 모래 해변이 어느 날 해수욕장으로 지정되면서 민박업을 시작했고, 성수기에는 외할아버지가 부엌에서 주무셨을 정도로 손님이 붐볐다고 한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만 해도 할머니 댁에 가면 설렘이 한가득 묻어난 얼굴로 튜브를 끼고 있던 20대 언니오빠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몇 년 뒤 마을 뒤쪽으로 4차선 국도가 넓게 뚫리면서 마을 길을 지나가는 차량이 크게 줄었고, 자연스럽게 민박 손님도 줄어들게 되었다고.


할머니 댁에 도착하니 마당에 상추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다음 날이 장날이어서 미리 밭에서 따다 세척해두신 것이었다. 대야에 담긴 감자,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랫줄,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키토산 퇴비 포대자루를 보고 있자니 비로소 내가 시골에 왔구나 싶었다.



작년에도 느꼈지만, IT 기술 속에 둘러싸여 살다가 정반대의 장소에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편안했다. 시골 특유의 소박함을 느끼고 있노라면 머릿속 잡념이 사라져간다. 이곳에서의 걱정거리는 화장실 문을 열었을 때 귀뚜라미(혹은 비슷한 존재)가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는 점 정도다. 이마저도 나한테나 걱정거리지, 할머니한테는 별일도 아니다.


할머니는 어찌나 바쁘신지 유모차를 끌고 끊임없이 움직이셨다. 집 앞 작은 밭에서 저녁에 먹을 쑥갓을 한가득 따는가 하면 어느새 뒷밭에서 고추를 따고 계셨다. 이내 마당 수돗가로 돌아와서는 물을 길어 채소를 씻으시고 그 물을 그대로 가져다 방울토마토 화분에 주셨다.

할머니 뒤꽁무니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며 영상을 찍으니 손녀가 대체 왜 이러는지 의아하셨는지 "할무니 찔뚝찔뚝한다고 찍나?"라고 한마디 하셨다. 할머니에게 카메라를 들이댄 이유는 엄마를 위해서다. 평소에도 동영상과 사진으로 일상을 기록하는 걸 좋아해 지난번에 울진에 왔을 때 할머니를 영상으로 남겼었다. 그 영상을 엄마께 보내드렸더니 5분짜리 짧은 영상을 반복해서 계속 보시는 모습을 보고 앞으로도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했더랬다. 나의 할머니 밀착취재 영상은 엄마의 7남매 단톡방 공유되어 외삼촌과 이모들께 《인간극장》 같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오랜만에 성류굴에 재방문해 다시 한번 감탄하며 관람하고, 장에서 돌아오신 할머니와 다 함께 죽변항에서 물회를 먹고(내 인생 첫 물회였다),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거실에 누워 수다를 떨었다.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서 “할머니~ 저희 사진 찍어요~!” 하며 얼굴을 들이대니 다 늙어빠진 얼굴이 뭣이 예쁘다고 사진을 찍냐는 말씀을 하시면서도 크게 함박웃음을 지어주셨다.




2박 3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점심을 먹고 나갈 채비를 하던 중, 할머니가 거실 바닥에서 작은 쓰레기를 주워 휴지통에 정확히 던져 넣으셨다. 나와 언니가 동시에 "와아아아아!"하고 감탄하니 할머니는 소녀처럼 깔깔 웃으면서 말하셨다. "와, 너거들은 못하나~"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언니가 "할머니 집에서 한 달만 살아보고 싶다"라고 말했고, 나는 그 말에 공감했다. 진지하게 올해 내 갭이어가 끝나기 전에 울진 한달살이를 계획해볼까 싶다. 1도 차이로 지옥불과 냉골을 오가는, 최적의 각도를 찾으면 절대 건드려선 안 되는 할머니 집의 다이내믹한 샤워수전이 벌써 그립다. 아. 할머니 보고 싶다.


할머니 집 작은 방
예전에는 툇마루였던 공간


작가의 이전글 "이게 진짜 이름이에요?" 下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