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그루밍 성범죄> 이해하기
전부터 온라인 그루밍 성범죄에 대한 글을 구상 중이었습니다. 평소처럼 미루던 중이었죠(..).
그러다 요즘 재밌게 보는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희도와 유림이 온라인으로 만난 사람의 신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설레는 마음으로 예쁘게 꾸미고 나가는 것을 보며 글을 얼른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코로나-19 사태를 맞으며 여러 국가의 수사기관은 '온라인 범죄'의 증가를 예의주시합니다. 피싱 등 온라인 사기 범죄도 문제가 되겠지만, 저는 특히 청소년들이 온라인으로 관계를 맺으며 마주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주목했습니다. (https://www.fbi.gov/news/pressrel/press-releases/school-closings-due-to-covid-19-present-potential-for-increased-risk-of-child-exploitation)
온라인 관계에서 시작된 성범죄 사건을 점점 많이 접합니다. 대놓고 만남을 위한 어플보다, sns에서 시작된 사건을 풀어나가는 것이 더 어려워요. 요즘 젊은 세대는 전화번호를 기반으로 한 카카오톡보다 sns를 기반으로 한 페이스북 메시지를 더 활발히 사용하더라고요. 사생활 관여도가 훨씬 높은 메신저를 선호하는 거죠. 카카오톡으로는 그 사람의 프로필 사진 정도만 확인할 수 있지만, 페이스북에는 일상생활과 친구관계 등이 노출되어 있으니까요. 직접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 동안에도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며 친밀감을 느끼기 쉽죠. 그러다 보면 실제로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이는 성범죄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온라인 그루밍 성범죄는 단번에 일어나지 않아요. 좋아 보이는 사람에 의해 서서히 이루어집니다. 여러 연구를 종합해보면, 온라인 그루밍 성범죄는 다음과 같은 심리적 역동을 거칩니다:
우선,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접근합니다. 페이스북 그룹에서 피해자의 계정을 보고 친구 신청을 한다거나 게임을 하다 카카오톡 아이디를 물어보는 행동들이 포함되겠죠. 그 뒤 가해자들은 피해자의 경계를 풀고 신뢰를 얻기 위해 친절한 행동을 합니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온라인에서 처음 알게 된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상식이니까요. 가해자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기에, 초반에는 좋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칭찬을 하거나, 비밀을 공유하고, 가벼운 선물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해자는 여러 질문을 통해 피해자를 파악합니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죠. 무서운 부모와 교사와는 다르게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 내가 맞춰줘야 하는 친구와는 다르게 내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는 사람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쯤 되면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먼저 연락을 해 힘든 일을 토로하게 될 정도로 심적으로 의존하게 됩니다. 가해자는 이를 놓치지 않습니다. "나한테는 다 얘기해도 돼"라며 피해자와 자신이 독점적이고 유일한 관계임을 강조합니다. 함께 부모나 친구를 욕하며 피해자를 현실의 관계에서 고립시키고 자신에게 애착을 형성하게 할 수도 있어요.
가해자는 어느샌가 성적 요구를 해옵니다. 이는 "섹스하자!"처럼 단번에 나타나지 않아요. "보고 싶은데 사진 좀 보내줘"처럼, 때로 이런 성적 요구는 낭만적일 수도 있죠. "옆에 있었다면 안아줬을 텐데"라는 식으로 오프라인 만남을 제안할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술 한 잔 하고 털어버릴까?"라며 음주를 권할 수도 있고요. 이런 요구는 점차 수위를 높여가고 피해자는 어디에서 선을 그어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워집니다.
이 단계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기도 해요. 그러나 명확한 거절보다는 "아 그건 쫌 그런데..."라는 식으로 가해자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는 정도로 돌려 말하죠. 가해자는 이를 '자신에 대한 거부' 혹은 '불신'으로 치환하여 피해자를 몰아붙입니다. "네가 정말 좋아서 그랬던 건데 너는 아니었나 보다"라며 피해자를 자책하게 하거나 "나를 못 믿어?"라며 피해자를 비난합니다. 피해자가 자신에게 종속되었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마치 관계를 단절할 것처럼 강하게 나갈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동안 주고받은 대화나 사진을 유포한다는 협박을 할 수도 있고요.
놀란 피해자는 결국 가해자의 요구를 점차 수용하게 됩니다. 가해자는 이런 요구를 받아들인 피해자에게 애정을 표함으로써 점점 피해자가 가해자를 거부하기 어렵게 만들죠.
이 과정을 천천히 보면 이해가 되시죠? 물론 모든 사건이 동일하지는 않겠지만 많은 사건에서 위와 같은 특성들이 발견된다고 해요.
그러나 성범죄 사건이 발생한 뒤 이 관계는 많은 의문을 유발합니다. "둘이 사귄 거 아니야?", "성관계하려고 만난 거 아니야?" 같은 질문에 대해 피해자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그러게 왜 인터넷으로 사람을 만났냐"는 질책에 피해자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수사관 입장에서는 난감한 노릇입니다. 성관계에 동의한 것처럼 보이는 대화 내역까지 발견되면 더더욱 그렇죠. 위에서 보았듯 가해자들은 피해자와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면 성적 접촉에 대한 언급을 숨기지 않습니다. 피해자는 이를 알고도 성인을 만납니다. 피해자들은 가해자와 연인 관계였다고 여길 정도로 친밀감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니까요. 결국 '강간' 혐의 입증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부모님에게 혼났을 때. 친구들과 다퉜을 때. 세상에 나 혼자라고 느껴져 침대에 누워 휴대폰만 만지작댈 때. 답답한 마음에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을 때. 그때 온라인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은 도피처가 되어 줄 수 없어요. '이 사람은 내 고민을 들어주는 좋은 사람이야'라고 믿지 마세요.
스물다섯, 스물하나. 궁합도 안 본다는 네 살 차이죠. 그러나 스물셋, 열아홉으로 바꾸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본인 또래와 어울리지 않고 계속 청소년에게 접근하는 성인은 의심해야 해요. 적절하게 사회 적응을 하지 못한 사람일 수 있다는 의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게만 특별히 잘해준다는 환상을 버리세요. 청소년의 눈에 성인은 그 자체로 멋있어 보일 수 있습니다. 사실 보잘것없는 사람이더라도요. 아는 것도 많아 보이고, 돈도 벌기도 하고, 술도 자유롭게 마실 수 있고,...
그렇게 당당한 희도조차 이진을 보며 롤러코스터를 탑니다. 동경, 자괴감, 애정, 질투, 의지... 이런 복합적인 감정이 버겁다고 토로하죠.
희도는 모친에게 충분한 신뢰와 애정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있고, 희도의 말을 빌리자면 '친구가 없어서' 그간 자신의 속이야기를 나눌 상대도 없었고,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음에도 국민적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린, 취약한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걸 다 지켜본 이진이 희도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간다면, 당신은 거절할 수 있을까요?
제가 고등학생이었다면 거절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럼에도 이진은 희도에게 교제나 성적 접촉을 요구하지 않죠. 왤까요?
드라마니까요.
이 글을 보고 있는 청소년 분들. 누군가와 온라인으로 연락하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대화 내용을 타인에게 말하는 것이 점점 꺼려진다면 위험 신호입니다. 온라인에서 누군가와 친해진 것은 절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상한 낌새가 있다면 타인과 공유하는 것을 꺼리지 마세요.
어떤 메시지나 사진을 전송하거나 온라인에 게시하고 나면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온라인에서 누군가 성적 요구를 해온다면 혼자 고민하지 말고 보호자에게 얘기하세요. 온라인에서 발생하는 모든 위협은 농담이라고 하더라도 극히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온라인으로 알게 된 사람과 실제로 만날 때는 보호자에게 얘기하시고, 만날 상대방에게도 보호자가 이 만남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 시키세요.
오해하는 분은 없으시겠지만 저도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매우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인절미와 라이더37은 서로의 속마음을 공유하는 돈독한 사이고(다행히도 둘은 동갑의 여성이고요), 이진과 희도는 서로를 성장하도록 돕는 긍정적인 관계죠(다행히도 이진은 선을 넘지 않고요).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런 많은 '다행'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스스로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썼어요.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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