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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드러머 May 25. 2022

P와 J, 그리고 E와 I 사이

혈액형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다. 그땐 헌혈할 사이도 아니면서 처음 보는 사람한테 다짜고짜 혈액형부터 물었었다. 겨우 4가지 유형으로 사람을 구분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의 혈액형과 그의 혈액형을 들으면 '맞아 맞아'를 손뼉치놀라워했었다.


요즘엔 MBTI가 유행이다. 혈액형보다 무려 4배가 많은 16가지 유형이다. 설문조사에 체크해서 유형을 구분하기 때문에 신빙성도 높고 혈액형보다 설득력이 높은 것 같다.  


처음 MBTI 검사를 받았을 때가 20년 전이다. 그때 검사 결과는 ENFP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예술가적인 기질이 있고 관료제에 어울리지 않는 유형이다. 그 후 난 내가 혈액형 O인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듯 나의 성향이 ENFP임을 받아들이면서 살았다. 그건 나를 상징하는 지표 이상이였다. 그러니까 O형이 다른 피보다 낫다고 생각한 것처럼 ENFP도 다른 유형의 성향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었다.


최근 MBTI가 유행하면서 MBTI 검사를 다시 해봤다. 요즘엔 온라인으로 간단히 검사할 수 있다. 그런데 20년 전과 결과가 다르게 나타났다. ENFJ다. 20년 동안 철석같이 ENFP라고 믿었던 나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다시 검사해봤지만 여전히 ENFJ다. 어느 날 혈액형 검사를 받았는데 평생 좋은 피라고 확신했던 나의 혈액형이 다른 혈액형으로 나온 것과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MBTI가 바뀐것에 대해 나름 생각해봤다. 둘 중 하나의 검사가 잘못됐을 수도 혹은 그사이 내 성향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검사 결과를 떠나 나는 P와 J 사이에 있다. 여행을 갈 때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느냐, 아니면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노느냐에 따라 P와 J로 나누는데 나는 이 두 가지 모두를 가지고 있다. 정확한 교통편을 잡고, 가야 하는 곳에 대해 시간 별로 계획을 세운다. 이건 정형적인 J다. 하지만 여행지에 도착해서는 즉흥적으로 즐긴다. 계획에 없던 좋은 곳을 발견했다면 그곳으로 간다. 좋은 풍경을 만났다면 그냥 그곳에서 멍 때리기도 한다. 이건 전형적인 P다. 만약 내가 영국과 러시아로 여행을 간다고 하면 그 계획만 며칠 몇날을 잡을 것이다. 영국의 음악과 문학 관련한 코스를 검색하고 날씨도 체크할 것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체취가 묻어있는 박물관도 필수코스다. 열람시간, 입장료까지 철저하게 계산해서 준비한다. 그렇게 해서 영국에서 일주일, 러시아에서 일주일을 보내기로 하고 떠났지만 영국이 너무 좋다면 러시아를 취소하고 영국에서 2주를 보낼 수 있고 반대로 영국이 별로면 영국 일정을 취소하고 남은 일정을 모두 러시아에서 보낼 수 있는 게 나다.


계획은 철저하게 새우지만 실행은 즉흥적으로 하는 게 여행만 그러는 게 아니다. 일도 그렇다. 한 주나 하루가 시작할 때 그 주나 그날 할 일을 정리한다. 하지만 일정은 상황에 따라 즉시 바꾼다. 책을 읽을 때도 언제까지 무슨 책을 읽을지를 철저하게 정한다. 하지만 여러 권을 동시에 정신없이 읽기도 하고 꽂히는 책이 있다면 그것부터 먼저 본다. 소비할 때도 비슷하다. 어느 날 갑자기 상점에 들어가 즉흥적으로 물건을 고른다. 하지만 이는 몇 개월을 생각하고 생각했던 것을 그날 행동한 것뿐이다.


내가 이와 같이 행동한다고 누군가에게 설명하면 나의 성향이 P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J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난 아마 P 같은 J이거나 J 같은 P인 것 같다. 20년 전에는 조금 더 즉흥적이었다면 지금은 조금 더 계획적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20년 전에도, 지금도 나는 E다. 하지만 I에서 멀지 않은 E다. I가 내재된 E라고 설명할 수 있다. 내가 전형적인 E 사례는 많다. 콜드콜도 서슴없이 한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고 그와 몇 시간이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웃고 떠들 수 있다. 처음 가는 장소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설렌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익숙한 것과 반복적인 것이다. 새로운 걸 좋아하니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간다. 전형적인 E다. 수 백 명이 모인 파티에서도 잘 어울린다.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하고 친한 척도 잘한다. 그런데 여기까지다. 스탠드 테이블에 와인이 있고 EDM 음악이 흐르고 외국인도 여럿 보이는 스타트업 네트워킹 파티는 설레어 찾아가지만 1-2시간 정도까지다. 인사 등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어색해진다. '이제 뭐하지'라면서 약간 뒤로 물러선다. 왠지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된 것 같다. 서둘러 혼자 나온 적도 많다. 2차를 함께 한다거나 갑자기 친구, 동생을 하자고 한다거나, 혹은 집 방향이 같다며 같이 가자고 한다거나 취향을 공유하면서 나중에 함께 하자고 하면 나는 전혀 반갑지가 않다. 무엇보다 나는 네트워킹 파티에서 나와 집에서 혼자 할 것이 많다.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좋다. 이런 즐거운 일을 미루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친한 척하면서 많은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혼자 지내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관계보다 더 빠르게 관계가 형성되면 두다. 그러면서도 혼자 있을 때의 외로움도 견디기 싫어한다.


나 같이 E와 I에, 그리고 P와 J에 걸쳐 있는 사람을 위해 MBTI가 기존의 2가지로 구분했던 것을 3가지로 구분하는 건 무리다. 한 카테고리를 지금처럼 2가지로 나눌 때는 16가지 유형이지만 3가지로 나눌 경우 무려 81가지 유형으로 확대된다. 구분이 너무 세밀하면 의미가 없어질 우려가 있다. 하지만 도대체 그 중간에 떡하니 서있는 나 같은 놈을 어떤 유형으로 구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흔한 말로 나는 나일뿐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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