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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정 Oct 31. 2022

지숙에게

지숙이가 떠났다.


작년 4월, 회사 앞 커피숍 소파에 앉아 서울대병원에서 받은 시한부 선고를 전해 들으면서 우리 둘은 펑펑 울었다. 펑펑 운건 운 거고… 식당에 데려가 순두부를 먹었다. 저녁은 먹어야 하잖아. 잘 먹자, 그리고 잘 살자. 지숙은 4월부터 시한부 선고를 한 병원과 의사 보란 듯이 씩씩하게 잘 지냈다. 여행을 가고, 캠핑을 가고, 차를 새로 사고, 새 차를 뽑은 기념으로 드라이브도 했다. 병원 선생님한테 요즘 얼마나 잘 지내는지 말할 거리가 넘쳐났다. 선생님도 캠핑 다니는 지숙이 부럽다고 했다고 했다. 그럼 그렇지, 사람이 죽는다는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다니.


지숙과 나는 사회 초년생이었던 때, 친구의 친구로 처음 만났다. 워낙 사람을 좋아하는 지숙과 그런 지숙이 좋았던 나는 쉽게 친해졌다. 첫여름 휴가를 누구랑 어디로 갈까, 하다가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지숙과 터키를 가기로 했다. 지숙은 대학생 때 인도 배낭여행, 일본 자전거 일주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여행 베테랑이었지만, 나는 그런 해외여행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해외에 있는 친구 집에 다녀오는 정도 말고는 혼자 숙소를 예약하고 다녀오는 그런 여행은 처음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가려는 나에게 지숙은 단호하게 배낭을 사라고 했다. 우리의 여행은 배낭여행이 되어야만 한다면서. 지숙의 여행 계획에 토를 달지 않았던 나는 순순히 배낭을 샀고, 아무 계획 없이 터키로 떠났다. 그때의 내가 어떻게 그렇게 무모하고 겁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지숙이가 메일로 보낸 버스 정류장 주소만 받고 밤 비행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그때서야 겁이 조금 났던 것 같기도 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둘러싸인 타국에서 오직 지숙을 만나는 것만이 예정되어 있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리자 터키 남자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정현정?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네? 누구세요? 말을 더듬는데 그 남자 등 뒤로 지숙이 장난스레 나타났다. 여기서 사귄 친구야. 빠르기도 하지… 지숙인 며칠 먼저 도착한 터키에서 한국어를 공부한다는 터키 친구를 사귀었다. 나는 터키에서 게스트하우스에서 자는 배낭여행을 처음 경험했다. 그때 산 38리터짜리 배낭은 지숙과의 여행에 여러 차례 동행했다. 스페인, 중국 윈난성, 페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칠레, 브라질, 캐나다… 수많은 나라들을 그 배낭 그리고 지숙과 함께 했다. 함께 사는 사이가 아닌 친구와 그렇게 24시간 붙어 있을 시간은 여행밖에 없을 텐데… 나와 지숙이 함께 한 시간을 모두 이어 붙이면 얼마나 될까. 어느 여행지도 지숙과 함께라면 걱정할 게 없었다. 지숙은 머리 회전이 빠르고, 실행력이 좋았다. 여행 파트너로서의 나의 장점은… 그 결정에 토를 달지 않고 몸을 맡기는 것이었다.


우리의 2021년, 해외여행은 2년째 지속되는 코로나로 기약 없이 막혀 있었다. 지숙은 국내 여행과 캠핑을 떠났다. 다행히 나와 다른 친구 나혜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코로나로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서 휴직을 반복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즐거운 이유는 아니었지만, 시간은 얼마든지 낼 수 있었다. 부산, 울산, 여수, 남해, 전주, 부안… 지숙은 국내 어디든지 갈 수 있었고, 우리 역시 그랬다. 지숙의 건강은 점점 좋아지는 것 같았다. 역시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우면 병이 낫는 걸까. 암의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치유 과정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추측에 추측을 더해 미래를 낙관했다. 시한부가 어쩌고 했던 의사 선생님은 지독한 비관주의자였던 것 같고, 우리의 시간과 웃음이 지숙을 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지숙의 상태가 나빠지고, 지숙은 이제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는 수술을 했다.


지숙이 처음 병을 알 게 된 건 우리가 함께 남미에 다녀와서다. 지숙의 지시(?)로 산 배낭을 메고 우리는 남미 5개국을 여행했다. 우리는 서른이었고, 서른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촌스러운 짓이라고 생각하면서 나이를 잔뜩 의식하고 있었다. 그 무렵의 우리는 회사 생활에 지친 5년 차였고, 항상 이곳 말고 어딘가에 ‘진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둘이 캐나다에 가서 살아볼까? 이야기를 했던 것도 그때쯤이었다. 결국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남미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이곳 말고 어딘가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남미에 가고 싶었다. 지숙은 그런 나를 따라 사표를 던졌으나, 결국 휴직으로 처리하고 나와 함께 떠났다. 남미 여행은 몸이 편한 여행은 아니었다. 여행자로서 할 수 있는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는데… 지숙은 자주 등 쪽이 아프다고 했다. 나는 시간 날 때마다 안마를 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이었다. 함께 여행하던 친구들도 틈 날 때마다 지숙의 어깨와 등을 두드렸다. 남미 여행을 마치고 와서 건강검진을 한 지숙은 암 선고를 받고 첫 수술을 했다. 남미에서 아팠던 게 암이었다니… 잃어버린 퍼즐은 맞춰졌지만, 공포스러웠다. 백수 신분이었던 나는 시간이 많았고, 수술받는 지숙 곁에 있을 수 있었다. 암이라는 게 얼마나 끈질긴 병인지 몰랐던 나는 그 수술이 처음이자 마지막 수술이 되어 지숙이 완치되리라 생각했다. 그 후 지숙은 재발과 재수술, 항암 치료를 반복했다. 매번 나조차도 절망스러운 반복 속에서도 지숙은 의지와 희망을 잃지 않았다. 몇 번의 고비를 이겨내고 완치 판정을 받고 얼마나 기뻤던지… 지숙은 10여 년에 가까운 투병 생활 내내 그 누구보다 병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강했다. 지숙아 너는 위인전을 써야 돼… 나는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이 위인의 정의라면 그건 바로 지숙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지숙보다 강인한 사람은 없었다.


지숙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지숙은 아파하지 않았다. 우리는 명동 한복판 롯데 호텔에서 만났다. 호텔에서 업그레이드해서 내 준 스위트룸에서 을밀대 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 서울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커다란 룸에서 함께 웃으면서 냉면과 빈대떡을 나눠 먹었다. 지숙은 산소 발생기(?)가 필요했지만 함께 대화를 나누며 앉아 있는 데 무리가 없었다. 우리가 헤어질 일 따위는 역시 없어 보였다. 일상적인 인사를 하고 헤어진 건 그다음 주에 다시 서울에서 만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냉면 너무 맛있다. 불어서 오지도 않네. 다음에도 배달시켜 먹어도 되겠다. 내일은 명동교자 포장해서 먹을 거야? 맛있게 먹어. 그게 우리가 마지막으로 소리를 내 나눈 대화였다. 지숙은 그다음 주로 예정되어 있던 항암 치료를 끝내 받지 못했다. 지숙은 2월 10일, 전주에서 우리 곁을 떠났다. 너무 억울했고, 억울하다. 이렇게 생의 의지가 강한 사람도 꼭 데려가시는 이유가 있나요. 하느님, 예수님, 그 누구라도 있다면 묻고 싶었다. 이 정도의 고통을 주고 데려가는 이유가 있는지도.


지숙을 장례식장에서 보내고 돌아온 다음날, 택배에서 송장을 뜯다가 눈물이 터졌다. 송장이 잘 안 뜯겨서 칼로 잘라내고 힘을 주다가… 아 나는 이렇게 살아서 택배 송장을 뜯는데 지숙이는 이 세계에 없구나. 한 손에는 송장을 한 손에는 커터칼을 쥐고 펑펑 울었다. 참은 적도 없는 눈물이었다. 나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지 않았다. 죽고 나서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이제는 왜 사람들이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생각하는지 이해한다. 이게 우리의 끝일 리가 없어. 나중에 우리는 꼭 만날 거야. 너의 장례식장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널 소중하게 이야기했는지, 그때 다 얘기해줄게. 네 친구들이 모두 모여있는 광경을 너도 봤는지 그때 물어볼게. 지숙아, 아직도 네가 웃으면서 우리 집 현관으로 들어올 것 같아. 사랑해.



10월 31일, 오늘은 지숙의 생일이다.

지숙아, 생일 축하해.

네가 떠나고 처음으로 너에 대해 쓴다.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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