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의 젠더 챔피언 캠페인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대사관에서 진행한 '젠더 챔피언 캠페인(Gender champion campaign)'을 통해 이길보라 감독님을 만났다.
젠더 챔피언 캠페인은 여성의 날을 맞아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는 여성 리더를 지목해 활동을 격려하는 것으로, 네덜란드 정부에서 재외 네덜란드 공관들과 협력을 통해 진행했다. 이로 하여금 여성들을 응원하고 여성 인권 증진 및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고자 하는 취지로 마련되었다. #NLOurGenderChampions #IWD2021
지금 우리나라에 성 평등과 여성 인권 보호, 증진을 위해 힘쓰고 계신 분들이 너무나도 많지만 (다행스러운 한편 더 이상 힘쓸 필요가 없게 되기를 바라는 모순적 감정), 올해 지목할 분으로 바로 떠오른 것은 이길보라 감독님이었다. 젊은 여성 창작 노동자. 제도권에 갇히기보다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 개인적 경험을 사회로 확장시키는 스토리텔러. 여성 인권뿐 아니라 장애인, 소수자 인권 및 사회, 역사적 이슈를 다루는 작품 활동으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 이길보라 감독님을 노미네이트 할 이토록 충분한 이유에 한 가지 인연을 덧붙이자면 감독님이 네덜란드 필름 아카데미에서 수학하셨다는 것. 작년 여름에는 네덜란드에서의 경험을 엮은 책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을 출간하시기도 했다.
노미네이트 의사를 밝히고자 감독님께 연락을 드렸다. 최근 재개봉한 영화 <기억의 전쟁>과 더불어 동명의 책 출간 관련 일정으로 많이 바쁘셨을 텐데 기쁘게도 제안에 응해주셨다. 그렇게 여성의 날을 이틀 앞둔 3월 6일, 대사관저에서 대사님과 함께 이길보라 감독님을 만났다.
세계 여성의 날은 1908년 3월 8일, 미국에서 여성 섬유 노동자들이 노동 환경 개선과 참정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던 것을 계기로 선포되었다. 오늘날, 여성의 날에 꽃을 주고받는 것은 시위 당시의 구호였던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에서 유래한다. 빵은 생존권을, 장미는 참정권을 뜻한다. 빵과 장미, 굶주리지 않고 인간답게 살 권리의 상징. 장미는 아니지만 대사관에서는 감독님을 위해 오렌지색 튤립 꽃다발을 준비했고, 감독님은 튤립 무늬 가득한 셔츠를 입고 우리를 찾아주셨다.
캠페인에 대해 직접 한 번 더 설명을 드리고 젠더 챔피언 시상을 마친 뒤, 감독님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한 시간 가량 이어진 대화 속에서는 다양한 ‘차별’들이 등장했다. 성 차별, 장애인 차별, 직장 내 차별, 세대 간 차별, 그리고 인종 차별같이 코로나19로 인해 더욱 증폭된 차별의 종류까지. 언어적, 신체적 폭력으로 행해지는 차별 외에 코로나 시대에 수면 위로 드러난 차별이 또 있었으니, 바로 경제-비경제 영역 간의 차별이었다. 해외에 있는 가족과 연인을 방문하는 것은 어렵지만 업무 차 방문에는 길이 열리는 모순. 그마저도 영리성 비즈니스만 가능한 이야기고, 비영리 분야는 쉽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내 업무 영역에서만 보더라도 작년 한 해 동안 직업으로서의 예술 활동을 위해 한국에 입국한 네덜란드 예술 종사자는 (대사관 파악 데이터 기준으로) 5명 미만이었다.
새삼스럽지만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 온갖 종류의 차별들을 뉴스에서 접하는 건 당연하거니와, 대부분 종류의 차별을 직접 겪었거나 근거리에서 보아왔다는 것을 말이다. 관저에 앉아 얘기를 나눈 나를 포함한 세 명의 여성들 중 한 명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면 다른 누군가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국적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과 하는 일이 다르지만, 강도와 빈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할 만큼 공통적으로 겪어온 것들이 있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체감할 수 있었다.
감독님의 이야기 중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본인의 작품 활동에 대해 ‘더 크고 중대한 이슈도 많은데 왜 이렇게 작고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하는가’ 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는 것이었다. 흑백논리로 답을 나눌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자그마한 반발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예컨대,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 자체도 중요하지만 ‘차별’이란 단어가 법원 같은 거대하고 견고한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은 무섭도록 일상적인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다.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생활 단위인 가족 - 그 제일 친밀하고 끈끈한 세계에서도 빈번히 일어나는 것이고, 택시에서 오늘 처음 본 이에게 이유도 모른 채 들어야 하는 폭언 같은 것이다. 또한 적극적 차별 외에도 포용성과 공평한 접근성이 확보되지 않은 환경은 누군가에게는 그 자체로 간접적 차별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세력뿐 아니라 '차별금지법? 그거 나랑 상관없는 일인데?' 하는 이들과도 함께 살아가고 있다. 오히려 너무 사소해서, 주변과 도처에, 어제도 오늘도 있어서 누군가는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왜 중요하지 않지? ‘작은’ 이야기들은 더더욱 다루어져야 한다.
집에 돌아와 그 ‘작은’ 차별들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차별의 종류는 무수하지만 그 원천은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사랑의 결핍. (하나를 더 꼽는다면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인식의 결핍. 하지만 인식의 결핍은 사랑의 결핍보다는 한 차원 바깥의 일이고, 더 먼저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캠페인 같은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믿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날 이길보라 감독님과의 만남은, 차별에 대해 말하면서도 사랑을 생각했던 시간. 사랑의 힘을 믿는 것이 결코 나약한 일이 아니라는 것과, 여성으로서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면서 의존적이지 않을 수 있고, 내 주변의 작은 것들에 애정 어린 눈길을 주는 일이 절대로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한 값진 시간이었다. 사람에 대한 사랑, 차별 없는 사랑, 소외된 사람들과 약자들을 향한 사랑, 나 자신과 나의 몸에 대한 사랑. 사랑이 출발점이자 원동력이고 곧 목적지인, 오늘날의 ‘빵과 장미’를 찾아가는 여정에 이렇게 멋진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아름답고 든든하게 느껴졌다.
하고 계신 작품 활동과 준비 중이신 프로젝트들, 그리고 그 내면의 멋진 생각들을 감독님께 직접 듣고 함께 의견을 나눌 수 있었던 것 역시 아주 귀한 경험이었다. 갖고 있던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책을 냉큼 가져가 싸인도 받았다. (‘성덕’의 시간☺️)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너의 상황에 공감하고 이해해. 그래서 지금 네게 필요한 건 뭐야? 내가, 우리가 그걸 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 감독님이 네덜란드에서 공부할 당시 누군가 곤란한 상황에서 도움을 청하면 사람들이 건네는 질문이었다고 한다.
곤경에 처한 누군가와 또 ‘우리들’을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함께 만들어 봐야겠다는 마음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 꿈틀대는 싹을 머지않은 날에 꽃으로 피워낼 수 있기를 기대하고 다짐해 본다.
마지막으로, 바쁜 일정 중에도 시간 내주신 이길보라 감독님께 이 글을 빌어 다시 한번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다. 현재 리서치 진행 중이시라는 <Our Bodies> 프로젝트 영상을 기대 + 응원하는 마음으로 아래 붙이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