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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진 Apr 14. 2021

머물러있지 않는 삶의 자세 -
영화 <노매드랜드>

누군가의 길, 누군가의 가지 않은 길

모르는 세계를 접하게 해주는 영화의 역할을 충실하고 아름답게 해낸 작품을 만났다. 


영화 <노매드랜드Nomadland>는 사랑하는 가족과 도시를 잃은 주인공 펀이 오랜 터전과 작별하고 낯선 곳을 돌아다니는 삶을 택하는 이야기다. 펀은 자신의 밴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가 아닌 ‘소개해준다’고 말한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방식도 그렇다. <노매드랜드>는 떠도는 삶을 택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소개해’ 준다. 


모든 선택은 ‘가지 않은 길’을 수반하지만 자신의 선택을 맹신하기란 너무 쉬운 일이다.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가지 않은 그 길 위에서 만남과 헤어짐을 나누는 노매드들의 모습은 낯선 한편 너무도 자연스럽게 와 닿는다. 그리고 그들 뒤로는 언제나 아름다운 대자연이 펼쳐져 있다. 


<노매드랜드>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 수입,배급: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광활한 풍광만큼이나 가슴에 각인되는 것은 고독을 끌어안은 듯한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얼굴이다. <쓰리 빌보드>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도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아픔의 그늘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짊어진 상실의 무게를 다루는 방법은 다른 모습이다. <쓰리 빌보드>에서 상실을 바로잡는 방식으로 그녀가 택한 것은 분절과 파괴에 가까웠다. 새빨갛게 칠한 광고판에 직설적 언어를 새기고, 건물에 불을 지르며, 다수의 적이 되길 마다하지 않았다. 


<쓰리 빌보드>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 수입,배급: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그랬던 그녀가 <노매드랜드>에서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연결과 흐름을 택한다. 각자 다른 사연을 안고 떠나왔지만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물물교환을 하며 생활을 유지하고, 강물에 몸을 맡기고 드러누우며, 캠핑장에서 주유소 앞 공터로, 공터에서 공원으로 삶을 움직여 나간다. 


영화는 길 위의 삶을 미화하거나 당신도 당장 차를 끌고 유영할 것을 부추기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선택을 유지하기 위해 떠난 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노동과 추위 같은 어려움을 비추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한다.

 

동시에 영화는 그런 상황을 재단하거나 연민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이 영화가 떠난 자들의 삶을 보여주지 않고 소개해준다고 느낀 이유다. 대상에 특정 시선을 취해 볼거리로 제시하는 것이 아닌, 그저 ‘이런 삶도 있다’라고 조용히 이야기 꾸러미를 내려놓는 것. 그것을 풀어서 어떻게 소화하는가는 관객의 몫이다. 이 초연한 영화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통제하려들지 않는다. 마치 펀과 그의 친구들처럼. 


<노매드랜드>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 수입,배급: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이별과 고독은 어디에나 있는 것.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자니 펀이 떠나온 집 뒤로 펼쳐진 텅 빈 대지만큼이나 헛헛해지는 가슴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노매드랜드>가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겪어본 적 없는 세상을 맞이한다는 점에 있어서, 상실의 아픔을 딛고 살아낼 용기를 다지는 모든 이들은 노매드인 셈이다. 그 여정을 위해 서있는 곳이 길 위든, 지붕 밑이든 말이다. 





여기부터는 사족. 영화를 보며 떠올린 것들.  


1. Nothing 

펀이 떠나야했던 네바다주의 임페리얼을 보며 아리조나 주의 또다른 고스트 타운 나띵Nothing이 생각났다. 구글맵으로 검색해 보니 두 곳은 차로 약 10시간 거리. 가본 적도 없는 아리조나 주의 이 땅을 알게된 것은 <Sad Topographies>라는 책을 통해서다. (저자: 대미언 루드Damien Rudd)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사막 도시. 그나마 경제가 성황하던 시절에도 최대 인구가 네 명 뿐이었다니 나름대로 지역 산업을 유지하며 200명 남짓의 사람이 살던 임페리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지금은 둘 다 버려진 장소들이다. 

Nothing, AZ


영화를 보다 이곳을 떠올린 것은 돌을 수집하던 스왱키 때문이다. 사막 도시인 나띵에 자원이라고 할만한 건 모래와 돌뿐이었고, 아마도 이를 살린 지역 기념품샵이었을 Nothing Rock Shop의 녹슨 간판은 마을에 몇 남아있지 않은 사람 흔적이다. 나띵이 진정 nothing이 되기 전에는, 겨울이면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향하는 노매드족들이 꽤나 거쳐가던 곳이었다고 한다. 기름도 넣고, 간단히 장도 보고, 돌도 좀 구했을지 모르고 말이다. 

나띵에서 남쪽으로 200km 남짓 더 내려가면 나오는 곳이 바로 RV 노매드족의 성지와도 같은 쿼츠사이트Quartzsite다. 영화에 등장하는 밥 웰스Bob Wells의 Rubber Tramp Rendezvous 모임이 실제로 열리는 곳이고, 영화 촬영도 - 실제 밥 웰스와 다른 노매드들과 -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극 중 이름과 실제 이름이 같은 인물들이 모두 '본인 자신을 연기한' 실제 노매드들이다. 스왱키도 이 중 하나다. 스왱키 소장품 중에 지금은 이름 따라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 마을에서 온 돌 하나쯤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Nothing, AZ" by moominsean is licensed under CC BY-NC-ND 2.0


2. 오노 요코의 플라스틱 오노 밴드Plastic Ono Band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The music is in your mind.
The mind is what we share
like sunshine and water.
What we can do, is to keep it running, flowing, and keep it clean - drinkable.
For us, there is no still water. All words are verbs and all statements are communication. 

- 'On Plastic Ono Band', a manifesto by Yoko Ono in 1971


'우리에게 흐르지 않는 물이란 없다. 모든 단어는 동사이며 모든 진술은 소통이다.'


영화 보기 하루 전에 읽었는데 저 문장의 맥 - 움직임과 관계 맺음 - 이 영화와 너무 닿아있어 신기하게 느껴졌다. 


3. 역시 며칠 전 광주비엔날레에서 보았던 작품. 펀의 대사 중 "What’s remembered, lives."와 완벽히 겹쳐보였다.

광주비엔날레 대만파빌리온 <한 쌍의 메아리> 중

본 리뷰에 사용된 스틸 이미지는 출처 및 영화 제작/배급사 정보를 명기 하였으며 영화 리뷰의 이해를 돕기 위한 쓰임 이외 영리적 목적이 없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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