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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진 Aug 26. 2020

그해 여름, 런던에서 만난 사람들 #1

출발할 땐 분명 혼자였는데


런던 남부의 램버스(Lambeth)로 가는 날이었다. 규모가 썩 크지 않은 곳들이긴 했지만 미술관 세 군데를 둘러볼 계획이었다. 혼자 여행할 때 일찍 일어나 조식 챙겨 먹는 스타일이 아니라 이날도 느지막이 준비하고 열한 시쯤 호텔을 나섰다. 배가 많이 고프지도 않았고, 문 닫기 전 세 군데나 둘러봐야 하니 간단한 브런치도 생략했다. 첫 번째 전시 관람 후 미술관 카페에서 간단히 요기를 할 생각으로.


악명 높은 런던의 날씨는 하루 안에도 변화무쌍하다. 그나마 내가 여행했던 7월 말 ~ 8월 초는 일 년 중 가장 날씨가 좋은 시기인데도 예고 없이 쏟아지는 비에 속수무책 아무 버스나 타고 비를 피한 적도 있다. 이날은 드물게도 날씨가 아주 좋았다. 좋다 못해 너무 더웠다. 민소매의 가벼운 옷차림에도 땀이 줄줄 나고 콧잔등에서 선글라스는 자꾸만 미끄러졌다. 첫 행선지는 버스에서 내려서 도보 이동이 꽤 필요한 곳에 있었는데,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거리가 어째 조금 삭막해졌다. 미술관을 마주치기를 쉽게 기대할 만한 느낌은 아니었달까. (이것도 편견이지만!) 그나마 쨍하게 내리쬐는 햇볕에 분위기가 어느 정도 상쇄되는 듯했다.


첫 번째 미술관 가는 길. 사진이 강렬한 햇빛을 다 담지는 못했다.


땀으로 반짝이는 얼굴로 도착한 첫 번째 미술관은 뉴포트 스트릿 갤러리(Newport Street Gallery).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본인의 컬렉션을 기반으로 전시를 기획해 선보이는 이다. 본인의 유명세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소장품의 명성에 꼭 확인하고 싶은 곳이었다. 아티스트가 아닌 기획자로서의 그의 손길이 궁금하기도 했고. 내가 방문했을 땐 ‘트루 컬러(True Colours)’라는 주제로 세 명의 떠오르는 작가들의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동네의 살짝은 거친 분위기, 건물의 뾰족뾰족 독특한 외관과는 반전으로 안으로 들어서니 온통 하얗게 정돈된 모습이 화이트큐브를 넘어 병원 세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닌 게 아니라 미술관 카페 파머시2는 약국 컨셉이다. 죽음을 생각하며 만든 데미안 허스트의 알약 작품에 휩싸여 무언가 먹는 기이한 경험을 해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이때는 운영을 잠시 중단한 상태였다.) 어쨌거나 눈부실 정도로 하얀 갤러리 내부는 색감에 집중하는 당시 전시 작품들과 무척 잘 어울렸다. 단순하지만 아름다움 자체로 호소하는 작품, 직관적이면서 직설적인 작업들… 잘 알려진 작가의 컬렉션을 전시하는 곳이다 보니 보통 전시와는 다른 궁금증들이 생기기도 했다. '데미안 허스트는  작품의 어디가 좋았던 걸까?  소장하게 됐을까?' 같은.


뉴포트 스트릿 갤러리 외관


True Colours 전시 전경


전시도 전시지만 이곳의 절대적인 하이라이트는 층간 갤러리를 이어주는 나선형 계단이었다. 흰 벽돌로 감싼 벽, 흰 손잡이, 흰 천정, 밟고 있는 나무 계단 외에는 온통 하얀 이곳을 오르면 어디 신성한 곳에 다다를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 정도. 계단을 한 걸음씩 오를 때 내 발소리의 울림까지 함께 기억이 난다. (아무도 없어서 슬쩍 셀피도 하나 남겼는데, 온통 하얀 사방이 반사판 역할을 해서 꽤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다.)


뉴포트 스트릿 갤러리 건축의 하이라이트, 나선형 계단



갤러리 카페가 문을 닫은 탓에 눈 뜬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두 번째 목적지로 이동했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비콘스필드 갤러리(Beaconsfield Gallery). 전시는 다소 어려웠고 결과적으로는 전시보다 여기서 만난 사람들과의 기억이 더 크게 남은 곳이 되었다. 아담한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관람객은 나뿐이었다. 몇 분 후 누군가가 들어오길래 ‘드디어 다른 관람객!’이라 생각한 순간 그녀는 작품 사이로 날렵하게 자리 잡더니 예사롭지 않은 몸짓으로 전시장 구석구석을 누비기 시작했다. 퍼포먼스였다…! 호기심 반 예의 반 조금 더 보고 싶었으나 땀을 많이 흘려서인지 당장 뭐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아래층 카페로 내려갔다. 카페도 대안공간 느낌의 자그마한 미술관과 똑 닮은 분위기. 가정집의 작은 정원 같은 야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용했던 전시장
퍼포머의 등장!


꽤 오래 걸려 주문한 아이스 플랫화이트가 나왔다. 기운 빠진 빈 속에 한 모금을 부으니 바로 속이 쓰렸지만 시원해서 조금 살 것 같았다. 테이블에 귀여운 방울토마토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미술관에서 키우는 것으로 추정되는 방울토마토 나무가 보여 위생 상태(?)는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진이 너무 빠져 저거라도 먹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말을 걸었다.


“네 반지 예쁘다!”  



2편에서 계속.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여름날의 영국 여행기입니다. 언급된 모든 전시정보는 2018년 8월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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