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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진 Aug 27. 2020

그해 여름, 런던에서 만난 사람들 #2

취향이 맞는 이들과 마주칠 확률

“네 반지 예쁘다!”  


반지를 칭찬한 – 액세서리는 최고의 컨버세이션 스타터다 – 주인공은 런던에 살고 있는 독일 출신의 패션 에디터이자 아티스트 랄리. 함께 온 친구는 역시 런던에 살고 있는,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퀘벡 출신의 캐나다인 샬롯이라고 했다. 나도 런더너인지 묻는 두 런더너에게, 정신없는 상반기를 보낸 후 손꼽아 기다리던 여름휴가 중인 서울 사람 신분을 밝혔다. 미술관 카페에서 만난만큼 대화는 전시 어땠냐는 질문으로 이어졌는데, 마침 어디선가 나타난 미술관 고양이가 우리가 앉아있는 벤치로 사뿐 올라와 샬롯과 내 사이에 갸르릉하며 누웠다. 마치 시찰이라도 하듯. 고양이를 사이좋게 나눠(?) 만지며 샬롯은 내가 아티스트인지 물었다. 이건 나를 가장 설레게 하는 멘트이기도 하지만 또 서글퍼지게 하는 멘트이기도 하다.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은 다른 방식으로 예술을 만지는 일을 하고 있다 정도로 소개했다. 


샬롯은 20년 넘게 런던에서 살았고, 프랑스어 선생님이었으며, 지금은 일을 쉬면서 앞으로 무얼 하고 살지 생각 중이라고 했다. 랄리는 예전에는 도자를 만들던 아티스트였지만 지금은 패션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어쩐지 멋진 아웃핏이었다.) 둘은 어떻게 만난 건지 물었더니 푸흐흐 웃으며 들려주길, 생선가게에서 줄을 서있다가 샬롯이 랄리의 강아지를 보고 예쁘다며 얘기를 나누게 되었고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 장면이 상상이 갔다. 나도 런더너였다면 이날을 계기로 이들과 오랜 친구가 되었으려나.   


그들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입에 들어갔을 방울토마토 한 알
붙임성 좋은 이름 모를 고양이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으레 코스처럼 전 대통령에 대해 묻기에 대답해 주었는데, 런던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 탄핵 얘기를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대화의 주제는 곧 다시 예술로 돌아왔다. 한국 미술은 잘 모르는데 본인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한국 아티스트가 있느냐 묻기에, 나는 주저 없이 런던에서 며칠 전 개인전을 보았던 이불 작가를 말해주었다. 전시도 꼭 가볼 것을 추천했다. (헤이워드 갤러리의 이불 개인전은 이 영국 여행 중 손에 꼽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뒤로도 미술 이야기, 영화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자 한국 영화를 딱 하나만 추천해야 한다면 무얼 하겠냐고 묻던 샬롯. 반사적으로 진부한 모범답안인 <올드보이>가 튀어나왔다. 그건 당연히 알고 있으니 그럼 로맨스 영화로 장르를 좁혀 다시 추천해 달라는 부탁에,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를 대답으로 건넸다. 샬롯과 랄리는 이어 각각 프랑스 영화와 독일 영화를 추천해 주었다. 아직 다 보진 못했지만 나에겐 내용 외적으로도 기억에 특별히 남을 영화들이란 건 분명하다.


샬롯이 추천한 프랑스 영화   

<Le Diner de Cons>

<Ridicule>

<L’Auberge Espagnole>


나도 똑같이 난처한 그 질문을 – 프랑스 영화를 딱 하나만 추천해야 한다면? – 되돌려주었는데, <아멜리에>라는 역시 진부한 모범답안이 돌아왔다. 그건 당연히 아니까 다른 거! 하니 샬롯은 위 세 영화를 알려주었다.


랄리가 추천한 독일 영화  

<The Lives of Others>

<Run Lola Run>

<Goodbye Lenin>


제목들을 메모하면서, 지금 기억나는 독일 영화는 <토니 에드만> 뿐이지만 아주 재밌게 본 멋진 영화였다고 말했다.



한참을 수다 떠느라 배고픈 것도 잊었다. 랄리가 나의 다음 계획은 뭐였는지 물었다. 가스웍스(Gasworks) 레지던시에 가보는 거라고 했더니 본인도 궁금한 곳이었다며 같이 가도 괜찮겠냐고 했다. 그렇게 세 번째 미술관에는 동행친구들이 생겼다. 지도를 검색해 보더니 가는 길을 알 것 같다는 랄리, 그러자 얘가 공간감각이 좋고 재밌는 곳도 많이 안다며 깨알같이 친구 자랑하던 샬롯. 혼자 여행하면서 걷는 게 심심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함께 걷는 사람들이 생기니 재밌었다. 지도 보느라 핸드폰에 고개 박고 가지 않아도 되는 것도! 걸어가면서 우린 잠깐씩 멈춰 독특한 건물들 사진도 찍고, 찍은 사진을 서로 돌려보기도 했다. 프랑스어 선생님이었던 경력답게 샬롯은 프랑스어 표현을 알려주겠다고 자처했는데, 최고 중의 최고라는 뜻의 ‘crème de la crème’이었다.  


Crème de la crème



셋이서 도착하게 된 나의 마지막 목적지는 가스웍스. 조각가 안토니 카로(Anthony Caro)가 세운 레지던시다. 열 명 남짓의 작가들을 위한 스튜디오와 갤러리 공간이 갖춰져 있고, 복스홀(Vauxhall)에 위치해 있다. 기관 자체도 궁금했지만 진행 중인 전시가 재밌어 보여 가봐야지 생각했던 곳. 몰랐는데 도착해서 보니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한국 작가 지원을 하는 곳이었다. 아르코 마크가 괜히 이렇게 반가울 데가. 당시 우리나라 작가로는 김실비 작가가 입주 중이었다.  


타잎페이스가 예뻤던 가스웍스
무심한 듯 귀여운 안내판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날 간 세 곳의 공간 중 가장 멋진 전시를 이곳에서 만났다. 런던 기반 활동 작가 에반 이퍼코야(Evan Ifekoya)의 개인전 Ritual Without Belief. 가스웍스 커미션으로 설치와 사운드가 결합된 작업이었다. 바닥에서 솟구친 바다의 파도가 색색의 풍선이 모인 천장으로 이어지고, 무언가를 얘기하는 목소리가 전시장을 계속 메웠다. ‘다원적 목소리(polyvocality)를 위한 조건을 만드는 탐구’라는 설명에 나름대로 고개를 끄덕일만했지만, 그 이전에 시청각적으로 무척 매력적인 작업이었다. 언젠간 바람이 빠지고 마는 풍선과, 밀려왔다가도 휩쓸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파도. 나란히 놓고 생각해 본 일이 없는 두 가지의 닮은 구석. 


전시 설명에 의하면 천장을 메운 풍선은 1970년대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파티 문화를 새롭게 주도했던 더 로프트(The Loft)를 상징하는 장치라고 했다 – 더 로프트는 퀴어로서 클럽에서 받는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데이비드 만쿠소(David Mancuso)가 초대 기반의 소규모 파티를 열던 것에서 시작해 진화한 곳이라고. 알고 보면 더 재밌지만 모르고 보더라도 이미 충분히 아름다웠다. 전시장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했는데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발을 벗었으니! 


멋진 설치 작업


그렇게 마지막 전시 관람이 끝나고 우리는 복스홀 역까지 걷기로 했다. 이번에도 길눈이 밝은 랄리 덕분에 구글맵 대신 주변을 둘러보며 걷는 호사를 누렸다. 역으로 가는 길에는 엄청난 규모의 오벌(The Oval) 경기장이 있어서 크리켓 얘기도 나왔는데 내가 잘 몰라서 길게 이어지진 못했던 것 같다. 랄리는 나처럼 중간중간 멈춰 서서 사소한 것들 사진을 많이 찍는 편이었는데, 그때마다 샬롯은 랄리의 사진 감각을 아낌없이 칭찬했다. 내가 봐도 멋진 사진들이었다.  


복스홀 역까지 가는 길, 나의 길거리 랜덤 사진들


지하철역에 도착해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까지 샬롯과 랄리는 내가 런던에서 좋아할 만한 것들을 계속해서 얘기해 주었다. ‘화이트 큐브 갤러리는 버몬시 지점이 특히 멋지다’, ‘켄싱턴궁 정원 영화 야외상영은 여름의 런던에만 허락되는 재미니 놓치지 마라’ 같은 것들이었다. 즐거운 하루에 고마움을 표하고 돌아서려는데 랄리가 건너편을 가리키며 한 마디 했다.

“참, 저기 저 빌딩이 MI6 건물이야. 실제로도 영국 SIS 건물이고.”


듣고 보니 어디서 본 듯한 건물. <스카이폴(Skyfall)>에서 폭파되었던 제임스 본드의 본부 MI6였다. 문득 내 하루도 007 영화만큼이나 개연성은 좀 떨어져도 신기하고 매력적인 시간이 아니었나 싶었다. 한 끼도 안 먹고 다섯 시까지 버텨준 내 체력도 불사의 본드 같았고...


리서치는 충분히, 계획은 유연히, 경계는 적당히. 지난 여행을 준비하고 대하는 태도였는데, 그러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한 날이었다. 반나절 간 내 취향을 제대로 파악한 두 친구가 쏟아내 준 양질의 팁을 지난 여행 중 다 실행해보진 못했다. 수다쟁이 두 런더너를 만났을 때 이미 여행이 중후반으로 들어선 후였기 때문에. 그렇지만 아직 못 해본 것들이 나를 다시 런던으로 이끌어 줄거라 믿는다. 아마 다니엘 크레이그 다음 제임스 본드 영화가 나오기 전엔 떠날 수 있지 않을까?



(2018년 여름 영국 여행기입니다. 언급된 전시 정보는 당시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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