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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진 Sep 27. 2020

운명이 노력으로 되나요?

에릭 로메르 <녹색 광선>

에릭 로메르의 영화 <녹색 광선>은 델핀의 여름휴가 이야기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진 바람이 이제 늦여름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계절, 복귀를 앞둔 휴가 마지막 날 이 영화를 보았다. 뭐라도 붙잡고 싶어지는 마음으로 택했다 해도 틀리지 않다. 


나와 델핀은 닮은 듯 다르다. 델핀은 채식주의자이고 나는 고기를 좋아한다. 델핀이 혼자 떠나게 된 휴가를 못 견뎌 공허해하는 반면 나는 홀로 하는 여행을 무척 아끼고, 또 그런 시간이 주기적으로 필요한 사람이다.


가장 다른 건 델핀이 남들 앞에서 눈물을 터뜨리는 – 슬픈 것을 봐서 같은 이유가 아니라, 복잡한 감정이나 우울감에 휘말려 – 일이 퍽 잦다는 거다. 하지만 델핀의 ‘우는 행위’를 나의 ‘울고 싶은 마음’으로 치환해보면, “나와 델핀은 닮은 듯 다르다”“나와 델핀은 다른 듯 닮았다”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 느끼는 게 비단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녹색 광선은 수평선 뒤로 넘어가는 붉은 태양 밑으로 찰나의 영롱한 초록빛이 관측되는 현상이다. 영화 <녹색 광선> 속 메타포로서의 녹색 광선은 완벽하다. 간절히 기다린다고 반드시 나타나지는 않는 것, 그렇지만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녹색 광선을 보고 싶다면 해 질 녘 수평선이 보이는 바닷가에 가는 정성 정도는 기울여야 하겠으나, 그날의 맑은 하늘이나 바다 안개 따위는 우리 영역 밖의 일이다. 그러니 녹색 광선을 보는 행운은 완전한 우연일 수 없으며, 완벽한 계획의 결과일 수는 더더욱 없다. 


녹색 광선이 은유하는 대상도 마찬가지다. 인연, 운명 같은 실체 없는 단어들. 그것을 찾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거의 무의미에 가깝다. 운명론자들은 저 단어들에 실체가 부여되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면서도 무계획이 곧 계획이라는 의도적 방관을 택하는데, 이는 다수의 행동파로부터 – 영화에선 대부분 델핀의 친구들이 이렇게 묘사된다 – 용기 부족 혹은 나태함으로 치부되곤 한다. 허나 다시 낭만주의자들의 언어에서 그것은 아직 용감해지고픈 대상이 없음을 뜻한다. 어떻게도 명쾌히 표현할 길은 없다. 그럼에도 굳이 시도해 본다면.. 무수한 순간들, 그 속에 내린 결정과 선택들, 흐르는 감정, 던진 눈빛과 말 한마디, 공간의 기류, 이런 것들이 뒤섞여 이르는 어떤 지점이라 할 수 있을까. (에릭 로메르와 자주 비견되는 홍상수 감독은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작품에서 이 탈논리적 명제의 아이러니를 적나라하면서도 시적으로 풀어내었다.) 누구도 완전하게 알 수 없으며 모두에게 들어맞는 모범답안은 존재하지 않는 것. 이 기묘한 난제를 60억 인구가 살면서 적어도 한 번쯤은 마주한다는 게 새삼 재밌고 경이롭다. 


“왜 억지로 해야 되죠?”


해변가에서 만난 낯선 남자의 데이트 신청 비슷한 것에, 델핀은 “왜 억지로 해야 되죠?” 하고 답한다. 쓸쓸함에 눈물을 훔치던 여인이 시원하게 토해낸 거절. 델핀이 그래 주길 내심 바랐고, 그럴 거라는 걸 어느 정도 짐작했다. 세상에 내키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내 마음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선택에도 정직하지 못하면 너무 슬플 것 같으니까. 외로움에 우는 것보다 훨씬 더.  


깨끗한 석양을 볼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여행가가 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마음이 홀연히 떠나라고 이끄는 어느 날엔 꼭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런 날엔 바닷바람이 아무리 세차더라도 두 눈을 크게 뜨고 타는 석양을 지켜볼 것이다. 혹시 아나, 붙잡고 싶은 녹색 빛줄기를 보게 될지. 너무 터무니없다고? 작전상 정체, 기다림의 미학, 느리게 갈 자유…. 그럴싸한 핑계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다. 이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난 지금이야말로, 다시 한번 낭만에 사활을 걸어볼 때다. 


영화 내내 감탄을 자아내던 빨강과 초록의 선연한 대비. 델핀의 패션은 또 어쩜 그리 감각 충만한지. 미장센으로도 낭만 마구마구 뿜어내는 에릭 로메르의 <녹색 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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