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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비또바 Nov 17. 2020

내가 그린 나무 그림은

오일파스텔로 그린 그림이고, 네가 그린 나무 그림은...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즐겁다. 그림을 만든다고 표현하는 게 적합할지는 모르겠지만 나이프화도 그렇고 썬캐쳐도 그렇고 내 손으로 완성해가는 결과물을 보는 건 꽤 보람 있다. 사실 이것도 한 때의 즐거움일 뿐, 그래서 무슨 의미가 있지? 그런 허무함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 한순간의 즐거움이라도 간절한 일상이다.


 B와 함께 오일파스텔 수업을 들으러 갔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B에게 제안했다. 사용하는 재료의 질감을 살린 그림을 좋아해서 오일파스텔도 예전부터 꼭 해보고 싶었다. B도 일말의 망설임 없이 같이 가겠다고 했다. 우리는 퇴근 후 7시에 화실 앞에서 만났다. 난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3시부터 이미 드릉드릉. 아마 B는 5시쯤부터 그러지 않았을까. 오랜만에 만난 B는 머리도 예쁘게 자르고, 손가락과 목에 멋진 새 타투를 하고 있었다. 반가운 모습이었다.



 처음에 오일파스텔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선생님께서 연습 종이를 내어 주셨다. 나는 연습 종이에도 선뜻 무언가를 그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준비해 간 사진 말고 다른 무엇을 그릴지 고민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B는 금세 자기가 기르는 고양이를 슥슥 그려냈다. 나는 그저 몇 가지 색을 골라 섞어보기만 하다가 본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시작은 오일파스텔이 아닌 마스킹 테이프였다. 깔끔한 프레임을 내기 위해 테두리를 마스킹 테이프로 감싼다. 비율은 마음대로. 4:3, 1.85:1, 2.35:1... 영화에서 화면비를 선택하는 것처럼 내가 그릴 그림에 가장 잘 어울릴 프레임을 선택한다. 나는 폴라로이드 사진 테두리처럼 하고 싶었다. 테이프는 너무 점착력이 강해 잘 안 떨어질 수도 있다고 해서 몇 번을 앞치마에 붙였다 띄었다 한 후에 붙였다. 중요한 팁이다.



 샤프로 옅게 밑그림을 그린 후 하늘부터 칠했다. 선생님께서 부드럽게 그라데이션하는 법을 알려주셨다. 어렸을 때 자주 썼던 크레파스가 사실은 '크래용+파스텔'의 줄임말로 한 회사에서 내놓은 오일파스텔의 상품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오일파스텔은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사온 그 크레파스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그래서 서로 다른 색을 촘촘하게 칠한 후 그 경계를 손가락으로 잘 문질러주면 자연스럽게 그라데이션이 된다. 문지른 부분은 살짝 거친 오일파스텔 특유의 터치감이 사라지고 파스텔처럼 반들반들 부드럽게 보이는데 거친 면과 부드러운 면을 모두 갖고 있는 게 정말 매력적인 재료다.



 그리고 이어서 건물 벽, 벽돌, 나무 기둥, 이파리를 차례로 그려갔다. 뭉툭한 끝으로 그리다 보니 아무래도 정교한 라인을 표현하거나 작은 면에 빈틈없이 색을 채우기는 어려운데, 이건 색연필과 찰필로 다듬는다. 전깃줄은 색연필로 그리고 이파리나 기둥 사이의 틈은 찰필로 문질러 빈틈을 채웠다.



나뭇잎 색은 아쉽지만 색연필로 그린 벽돌의 시멘트 라인이 마음에 든다.

 그림을 다 그리면 마지막으로 시작할 때 붙였던 마스킹 테이프를 뗀다. 이때가 제일 짜릿하다. 새 전자기기를 사고 처음 비닐을 뗄 때처럼 말이다. 깔끔하게 정리된 테두리를 보니 제법 더 그럴싸해 보였다. 선생님께서 오일파스텔 그림은 번지기 쉬워서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가급적이면 며칠 후 픽사티브(정착제)를 뿌려주면 좋다고 하셨다. 완성된 그림을 들고 오는 내내 혹여나 번질까, 혹여나 뭉개질까 노심초사하며 종이로 감싼 그림을 고이 들고 왔다.


이 나무 사진으로 시리즈물을 만들 것 같다.


 종종 또 그리고 싶다. 당근마켓에 오일파스텔 72색 검색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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