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 World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나의 가장 큰 과제는 구구단을 외우는 것이었다. 엄마는 매일 한 단 씩 외우는 것을 숙제로 내주셨는데 엄마가 퇴근하시기 전 구구단을 다 외워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던 나는 시곗바늘이 7에 갈수록 더욱 초조해졌다. 4시에 오는 어린 왕자를 기다리며 3시부터 행복할 거라던 여우를 믿지 않는다. 나는 한 시간 전이 아니라 하루 종일 초조했으니까.
그렇게 나를 괴롭혔던 구구단은 3학년에 올라가면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됐다. 무려 '나눗셈'이 등장한 것이다. 보스몹인 줄 알았던 구구단보다 더욱 강력한 상대를 만난 나는 좌절했다. 겨우겨우 힘을 끌어모아 나눗셈을 물리칠 수 있었을 때쯤에는 함수가 등장했고 그렇게 미분, 적분에 선형대수학이 줄줄이 나타났다.
좋아했으나 끝내 사귀지 못했던, 짝사랑보다 더 애틋한 수학 얘기를 길게 한 이유는 지금 배우고 있는 코딩이 구구단 같다는 강사님의 말씀 때문이다. '지금 배우는 거 어렵죠? 어려운 게 당연합니다. 다 처음 보는 것들이잖아요. 근데 다음 시간 되면요. 어째 어째 쓰고 있을 겁니다. 원래 그렇잖아요. 오늘 배우는 게 오늘 제일 어려운 법이죠.' 그 말씀이 용기가 됐다. 구구단을 어려워하며 외우던 때처럼, 정말 그럴까.
이름만으로 파이썬 짝퉁 아니냐고 의심했던 파이참은 통합개발환경(IDE)라고 한다. 꼭 이렇게, 말만 들으면 그래서 뭐? 싶은 거다. 통합, 개발, 환경. 모두 아는 단어의 조합이 전혀 이해 불가능한 단어를 만들어내곤 한다. 그래서 통합개발환경이 뭔데요?
파이썬을 쉽게 쓰기 위한 툴. 파이참은 약간 이런 느낌이었다. 아이템이 무궁무진한 파이썬이라는 창고에 갔는데 나는 뭐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른다. 이때 셀프 계산대 옆 옆에 서 있는 파이참이라는 똘똘한 점원이 눈치껏 다가와 두리번거리는 나를 도와준다. 알파벳 하나만 입력해도 자동완성으로 입력하려는 수식을 척하면 척 제시한다. 뿐만 아니라 아직은 모르는 여러 기능들을 잘 정리해서 사용하기 편하도록 도와줄 거란다.
파이참 설치가 끝나자마자 강사님께서는 프로젝트 파일을 만들어 필기를 하셨다. 나는 들고 있던 펜과 수첩을 머쓱하게 집어넣었다. 아날로그 인간이여 반성하라. 0과 1의 세상인 디지털을 배우러 왔지 않은가. 코딩의 교과서는 프로젝트 파일 그 자체였다. 교과서에 필기하는 것처럼, 코드는 코드대로 입력하고 따옴표 세 개(''')로 여닫아 주석처럼 부연설명을 달 수 있다. 이 편한 세상.
코딩으로 처음 한 건 내 나이 계산이다. 당신은 몇 년도에 태어났나요?라는 질문이 뜨고, 년도를 입력하면 올해 나이를 계산해 주는 것이다. 태어난 년도 x, 올해 나이 y 이렇게 미지수를 정하고 방정식을 상상한 뒤에 그 식을 프로그램의 형식에 맞게 써 내려갔다. 괄호와 등호를 적극 사용하는 것이 함수와 같았다. 저는 함수라고 하면 최근에는 f(x) 정규 2집 Pink Tape 수록곡 Goodbye Summer를 들은 게 전부거든요. 아, 그 노래 참 좋은데요. 머릿속으로 도입부의 기타 리프를 흥얼거리다가 '자, 됐죠?' 하는 강사님 말씀에 정신을 차리고 부랴부랴 따라가는 코딩 수업이란...
year = int(input(f'올해는 몇 년도 입니까?'))
올해는 몇 년입니까?라는 질문의 입력 값(input)을 받아서 year이라고 하겠다는 선언이다. 컴퓨터는 input으로 뭐가 올지 모른다. 년도니까 1992, 2002 같은 정수(整數) 일 걸 우리는 아는데, 그 당연한 걸 컴퓨터 너만 몰라. '적당히 상식이 통하는 우리 사이' 는 없어서 컴퓨터에게 하나하나 알려줘야 했다. '얘야, 곧 input이 들어올 건데, 그건 다 정수들이야. 알겠지?' 그런 의미로 input 앞에 정수로 처리한다는 int를 썼다.
그렇게 분명하게 하나하나 정해야 하니 시작은 좀 더디다. 대신 많은 것들이 그렇듯, 처음을 잘 터두면 나중이 편하다. 구구단처럼 처음 접한 수식들이 낯설어서 어려울 뿐인 거다. 이젠 어렵다고 초조해하지 않는다. 익숙해질 걸 알고, 익숙해지면 쉬워질 거라고 믿는 구석이 있다.
쭉 써 내려간 코드의 마지막은 print. print는 말 그대로 최종 결과를 인쇄해 준다. 하지만 A4 용지가 걸려 덜덜거리는 복합기처럼 print 수식에 닿기도 전 중간에서 막힌다. 문법을 틀리거나 오타가 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오류가 나면 점원이 다가와 지적을 해 준다. '저기요, 몇 번째 줄에서 틀리셨는데요.' 그걸 따라 찬찬히 살펴보며 깨닫는다. '앗, 괄호를 빠트렸네요. ^^; (머쓱)' 괄호 하나만 빠져도 얄짤 없다. ( 열었으면, 꼭 닫아줘야하 한다. ) 따박따박 지적해주는 파이참이 참 고맙다. 아니면 이 갯벌 같은 화면에서 어느 세월에 오류를 캐고 있겠는가.
그렇게 직원(a.k.a 파이참)의 도움을 받아 print 한 것은 겨우 내 나이였다. '당신은 몇 년도에 태어났습니까?' 질문에 답을 입력하면 '당신은 몇 살이군요.' 답이 나오게 하는 나이 계산기. 한참을 끙끙대어 고작 내 나이를 계산하고 있는데도 결괏값이 뜨는 순간은 감격 그 자체였다. 어머, 우리 애(=컴퓨터)가 내 나이를 계산해냈어!
그런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집에 가는 길에 개발자 친구한테 연락을 했다. '나 오늘부터 코딩 배워'. 그랬더니 친구는 'Hello, World!'라고 했다. 'Hello, World!'를 출력해 보는 게 코딩을 처음 배울 때 국룰이란다. 나는 여기에서 또 감동받았다. Hello, World! 라니. 처음 마주하는 컴퓨터 세상에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는 것 아닌가. 말 그대로 Hello, New World다. 지금은 내 나이 계산기 같은 거를 만들고 있지만, 이 새로 만난 세계에서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