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묵직한 하드디스크와 이십여 개의 메모리 카드 안에 들어찬 사진의 개수는 세어보기도 겁이 나고요.
연도와 여행지 그리고 달 별로 잘 정리된 폴더들도 있지만 어느 순간 미루고 미루다 기가바이트가 아닌 테라바이트가 되어버린 사진들은 이제는 쉽사리 정리를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아요. 물론 그 두려움의 바탕에는 '이성적인 나'가 가진 '감상적인 나'에 대한 불신이 있습니다. 폴더를 여는 순간 과거로 날아가는 추억 여행에 빠져 하루를 홀딱 날려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많은 사진들 중에서도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것들은 바로 사진으로 남겨두지 않았다면 기억도 하지 못할 너무나 사소한 순간을 포착한 사진들이에요. 너무나 사소해서, 그 사진 한 장 속에 담긴 찰나의 기억이 바래지기 전에 얼른 글로 풀어두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오래 지나 우연히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때의 내가 그 순간을 프레임에 가둔 이유조차 기억해내지 못하는, 그저 무용한 사진 한 장으로 남아 버릴 테니까요.
인생의 큰 변환점들은 굳이 기록하거나 상기시키지 않아도 우리의 뇌와 가슴속에 깊은 주름을 새기며 흔적을 남기지만 작은 순간들은 기록하지 않으면 잊혀져버려요. 그 순간만큼은 내게 충만한 행복을 주었던 존재임에도 말이죠. 사람은 쉽게 바뀌는 존재가 아니니 지금의 나를 행복하게 했던 건 나중의 나도 행복하게 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미래의 나를 위해서 지금도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붙잡아둔 찰나의 순간들을 기록해보고자 해요.
그리고 일련의 사진들을 보노라면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존재들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엔 이런 사진들을 정리하고 넘겨보는 행위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추구하는지, 어떤 것을 소중히 여기고 행복감을 느끼는지를 알려주는 든든한 지표가 되어줘요. 가끔 운이 좋으면 몰랐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해 주거나 미처 눈치채지 못한 내 안의 변화를 깨닫게 해주기도 합니다.
[순간의 기록]이라는 카테고리 아래에 차곡차곡 담아낼 기록들은 담백하게 사진 한 장을 중심으로 짧은 글을 곁들여 써보려고 합니다. 때로는 읽는 사람이 아래의 글에 이르지 않고도 사진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시간을 내어서 읽어야 하는 글 말고 시간이 있을 때 부담 없이 열어볼 수 있으면 해서요. 그래도 이왕이면 양은 작아도 영양가는 높은 프로틴바 같은 글이 되었으면 하는 게 목표입니다.
1n년간 쌓아둔 외장하드 속 사진들을 공개합니다. 스무 살에 찍은 사진도, 바로 어제 찍은 사진도 있겠어요. 그 사진이 언제의 것이 되었든 간에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건 현재의 나일테니, 어쩌면 사진을 찍던 그때와는 다른 시선으로 사진을 풀어낼 수도 있겠네요.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 나온다면 나오는 대로, 그때와 다르다면 또 다른대로 써봐야겠습니다.
자기보다 큰 나무를 물고 가는 저 귀여운 녀석 좀 보세요. 그를 보는 사람들마다 미소를 지어요. 이렇게 무해한 존재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