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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hn Oct 22. 2021

손뼉 치는 밤


 아이는 친구 집에 슬립 오버하러 가고, 나는 작업실에 들러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와인을 마시면서 글을 다듬는다. 우연히 만나 더 반가운 신기한 밤이다.

 오후에는 십 년 전에 썼던 일기들을 찾아 읽었다. 나의 첫째 딸이 하늘나라로 떠난 후의 날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때의 나는, 얼른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나 더디게 흘러가는 바람에, 나는 다시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 졌고, 때때로 웃고 싶어 졌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나는 살아남았다.

 그때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넌 결국에 내일을 기대하면서 잠드는 사람이 되었고, 예쁜 딸은 어느새 훌쩍 자라서 엄마를 적당히만 필요로 하게 되었고, 너를 설레게 하는 너만의 일이 있고, 네가 어릴 때부터 키우고 싶어 하던 고양이도 키우고 있어. 내가 이렇게 존재할 수 있게, 어떻게든 살아남아줘서 고마워-라고.


 자식의 죽음은 시간이 흘러도 전혀 희미해지지 않고, 전혀 무뎌지지 않는 날카로운 검이지만, 결국엔 그 검을 가슴에 꽂고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찾아낸다. 처음에는 그 고통에 의미를 찾아내려고 애쓰다가 곧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저 배가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그러다가 다시 아파하며, 시간아 빨리 흘러라.. 죽을 용기가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하루만 더 견디자는 심정으로 버티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버티는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52시간이다. 결국에 모든 것이 시간과의 싸움이다. 그 52시간이 48시간이 되고 36시간이 되고 28시간이 되고.. 그러다가 다시 24시간이 된다. 그렇게 더 이상 버티지 않아도 술술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찾아온다.


 그 52시간짜리 하루들을 버텨낸 과거의 내가 대단하다. 지금의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나는 유약하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유약할 수 있는 사치를 주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늘 강함보다 유약함을 선택할 것이다. 강함은 '강해야만 하는 상황'에 딸려오기 때문이다. 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그래서 별것 아닌 일들에 호들갑 떨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지금의 내가 이렇듯 잘 살고 있으니, 과거의 안신영아 너의 고생은 다 할만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사람의 죽음을 만회할 행복이나 보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미부여를 하는 것도 다 부질없다. 세상에는 아무런 의미 없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 많다.

 다만, 어찌어찌 버티고 살아남았더니, 이야기가 의외로 재미있게 흘러왔다고는 할 수는 있겠다.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인 것이 인생이라는데, 내게는 가까이에서 보나 멀리서 보나 마술사의 모자 속 같은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뭐가 나올지 알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가끔 이렇게 '느닷없는 자유와 와인과 고양이와 오래된 일기가' 모자에서 쏙 나오면 '어찌하여 이런 것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유 따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좋구먼'이라며 손벽을 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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