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안 인간연구소>
호림박물관 <검은빛의 서사> 특별전(전시 종료)
“내가 검은색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에 나오는 이 유명한 문장을 패러디해서 “내가 검은색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싶은 전시가 현재 호림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블랙을 주제로 기원전부터 당대의 현대 미술 작품까지 총망라한 보기 드문 기획인데, 이 전시는 우리가 ‘전시 예술(展示 藝術)’이라는 어찌 보면 매우 번거롭고 의례적인 행위를 왜 굳이 수행해야 하는지를 입증시킨다. 한국 사립박물관 가운데 호암미술관과 함께 투톱으로 꼽히는 호림 같은 대형 박물관은 당대가 주목해야 할 예술적 의제를 대중에게 제시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2025년 호림이 ‘블랙’에 주목한 안목은 탁월하다. 너무도 익숙한 색깔이라서 의문조차 품지 않은 ‘검정’에 담긴 매력적인 서사를 현묘(玄妙)한 작품들로 구현해 낸다.
전시는 우리가 그동안 검정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또 오인하고 있었는지를 일깨워준다. 죽음이나 어둠을 상징하는 것이라 지레짐작했지만, 우리 문화에서 생명과 태초를 나타낼 때 쓰는 최고의 색인 것이다. 이를 위해 <천자문>과 <연암집>이 전시에 등장한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天地玄黃)로 시작되는 <천자문>의 첫 문장에서 하늘은 파란색이 아닌 검은색이다. 연암(燕巖) 박지원은 저서 <연암집>에서 “홀연 유금(乳金) 빛이 번지기도 하고 다시 석록(石綠) 빛을 반짝이기도 한다”면서 당연히 검은색이라 치부했던 까마귀가 실은 단순한 검은 빛이 아니고 보기에 따라 매우 신묘한 색깔임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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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천자문>, 조선 1650년, 호림박물관 [우] 박지원, <연암집>, 1922년, 국립중앙도서관 / 사진출처. ©Horim Museum.
검은색은 권력의 상징색이기도 했다. 조선왕조 시대 검은 의복, 흑칠 가구 등은 왕실과 사대 부만 사용할 수 있었다. 검은색으로 옷과 가구를 염색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기에 권력층만이 향유했던 것. 조선 인조반정에서 공을 세운 ‘박유명 초상’은 2006년 보물 지정 이후 이번에 최초로 서울에서 공개됐는데, 보물 ‘이하응 초상 흑단령포본’과 함께 검은색 예복 차림으로 위엄을 떨치는 걸작 초상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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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응초상 흑단령포본>, 조선 1869년, 서울역사박물관 보물 / 그림출처. ©Horim Museum.
전시 예술은 작품만큼 공간도 중요하다. 전시 공간은 부차적 부분이 아닌 전시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극대화하는 결정적 장치다. 언제나 전시 공간 디자인이 세련된 호림이지만, 이번에는 가히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 해도 될 정도로 빼어나다. 모든 전시장을 오묘하게 감싼 은은하게 검은빛이 감도는 조명은, 전시가 전하는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관람객들은 공간을 거니는 것만으로 이미 ‘검은빛의 서사’를 향유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호림박물관 소장 컬렉션 가운데 대표 분야인 도자는 물론 회화, 의복과 서적, 공예품까지 다양하다. 무엇보다 검은빛을 주제로 한 현대 미술 작품의 배치가 압도적이다. 김호득의 설치 작품 '흔들림, 문득-공간을 그리다’는 바닥에 검은빛이 가득한 얕은 수위의 물 위에 흰빛의 한지가 겹겹이 걸려있다. 아래의 물은 다름 아닌 검은 먹물인데, 그 위로 너울거리는 한지의 그림자는 마치 어두운 밤하늘 달그림자 같다. 흑과 백의 강렬한 대비는 보는 이의 심연에 강력한 시각적 울림을 전하면서, 그 자체로도 완벽한 아름다움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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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득, <흔들림, 문득-공간을 그리다>, 2025년, 작가 설치작품 / 사진출처. ©Horim Museum.
120점의 작품 가운데 가장 백미는 역시 흑자(黑磁)다. 백자나 청자는 익숙하지만, 검은빛의 흑자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게다가 이번 전시에선 호림이 자랑하는 소장품 컬렉션 가운데 가장 빼어난 흑자들이 총출동했다. 앞서 연암 박지원이 까마귀를 표현할 때 썼던 표현이 이 흑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보는 방향에 따라, 비추는 조명에 따라, 보는 각도에 따라, 마치 마술을 부리듯 색이 변한다. 도저히 하나의 색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극강의 신비로움을 내뿜는 흑자는 불에 그을려서 또는 탄소를 흡착해서 고려와 조선시대에 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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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흑자 반구병>, 조선 18세기, 호림박물관 [우] <흑자 편병>, 조선 15~16세기, 호림박물관 / 사진출처. ©Horim Museum.
예전에는 “학이 1000년을 살면 청학(靑鶴·푸른 학), 2000년을 살면 현학(玄鶴·검은 학)이 된다”며 “현학이 등장하면, 태평성세(太平盛世)가 도래”한다고 믿었다. 바로 이런 믿음을 예술로 구현한 문화재가 고려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최초로 일반 공개되는 이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전시를 볼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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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고려 12세기 후반~13세기 전반/ 사진출처. ©Horim Museum.
온 우주의 시작과 내면의 지혜, 세속적 권위, 그리고 불멸 등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서사를 담은 검은빛의 향연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누구이고, 내가 추구하는 서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좋은 전시는 좋은 질문을 던지는 전시다. 그런 측면에서 ‘검은빛의 서사’는 이미 성공한 전시다.
최효안 예술 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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