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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Jul 18. 2024

당신이 필요해요, 조지 오월

 당신이 필요해요, 조지 오월


-에세이 항연의 시대에 필요한 에세이     

 현재 출판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장르는 분명 에세이이다. '에세이'라는 장르가 워낙 광범위하지만, 현재 출판 시장에서 통용되는 에세이는 형형색색의 표지에 실린 감성적인 산문정도 된다. 이러한 산문은 다채로운 표지와 달리 획일적인 내용으로 글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을 일차원적으로만 담아낸다. 마치 요즘 신간 에세이는 멜랑꼴리와 무기력함을 잉크로 삼아 찍어내는 양산형 에세이로 느껴진다. 이러한 글들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나, 과잉하다 못해 범람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문학 평론가 김현 선생은 "문학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 준다."라고 했다. 그러나 과연 감성 에세이가 정말로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억압하는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 주는가? 단연코 아니다. 현재 에세이는 짤막하게 쓰인감성적인 쉬운 글로, 독서를 했다는 만족감을 주는 것 외에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 느껴보지 못한 선험적으로 파악하거나,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파악하게 하지 못하게 한다. 재난의 시대인 21세기에, 인류는 다중 위기에 처해있고 이 위기는 곧 실존적 위기이기도 한데, 현재 주류의 에세이는 지나치게 무기력하다. 그럴수록 필요한 이름을 되새겨본다. 에릭 아서 블레어, 필명 조지 오웰의 작품으로부터 우리는 에세이가 가야할 길을 배울 수 있다.


1.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과 《1984》로 유명한 소설가이자 뛰어난 에세이스트이다. 그의 사상을 이해 하려면 반드시 그의 에세이에 접근해야 하는데, 여러 편의 글 중 가장 기념비적인 글이 바로 '나는 왜 쓰는가'이다. 이 글에서 오웰은 작가가 생계 외에 글을 쓰는 이유로 네 가지를 언급한다. 순전한 자기만족,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그리고 정치적 목적을 말한다.  오웰은 지난 10년간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 글을 예술로 승화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항상 당파성을, 불의를 감지하며 자신우 정치적 목적이 없을 때 전체적으로 실없는 글을 썻다고 말한다.

 오웰의 문학관은 '문학비평가는 문학투쟁의 전략가'라던 발터 벤야민의 《일반통행로》의 한 구절이 생각나게 한다. 오웰은 그 문학투쟁에서 반전체주의적인 사회주의를 사수하기 위해 사투를 벌였고, 그 산물이 바로 그의 대표 소설과 《카탈루냐 찬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은 정치와 상관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도 정치적 태도라는 오웰의 말은 문학은 순수해야 한다는 듯 떠드는 비정치적인 작가들이 새겨야만 한다.      


2. 노동자를 위한 글쓰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1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탄광 노동자에 헌사하는 르포타주라고 할 수 있다. 나름 명성있는 작가인 조지오웰은 1936년 한 진보단체로부터 노동자들의 실상을 취재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당시 《동물농장》이나 《1984》 같은 그의 대표작이 나오기 전이었지만 언론에 글을 기고하며 작가로서 막 이름을 알리던 시절이었다. 오웰은

두 달에 걸쳐 노동자의 집과 일터를 넘나들며 취재했고 이들의 생활 속에서 글을 썻다. 시인들이 몽상을 통해 시를 썻다면, 오웰은 현장에서의 경험을 녹여내 르포를 완성했다. 열악한 노동자들의 숙소 환경, 갱도에서 함께 흘린 땀, 일년에 280톤의 석탄을 채굴한 만큼 높은 노동력에 비해 착취당해 형편없는 임금, 열악한 위건의 위생 환경 등이 모여 총체적으로 당시 탄광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고발한다.  

 그의 필력은 탄광과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글로서 현실보다도 더욱 현실적으로, 입체적으로 재현한다. 오웰은 노동자가 생산하는 석탄 없이 굴러갈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이지만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 채 열악한 작업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현실을 생생히 재헌해 마치 갱도에서 탄진 가루를 뒤집어 쓴 듯한 느낌을 받는다. 형편없는 실업수당으로 사는 노동계급의 현실을 고발하면 계급의식이 치솟고, 그가 취재하던 열악한 영국 북부 도시의 위생환경을 묘사하면 마치 냄새가 연상된다.

 단지 오웰은 유희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만들어낸 잉여가치를 강탈하는 체제를 입체적으로 고발한다. 고발함으로써 적대 계급에 대한 분노를 일으켜 노동 계급 의식을 형성한다. 이 글을 읽은 노동 계급에 속한 구성원이라면 지배 계급에 대한 계급 적대와 노동 계급에 대한 연민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3. 조지 오웰의 이상 민주적 사회주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 2부

 1부가 르포타주였다면, 2부는 조지 오웰의 정치적 경향을 담은 에세이에 가깝다. 명문학교 출신이면서 인도에서 제국경찰 생활을 하다가 느낀 당시의 제국주의 만행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후 노동자들과의 함께 하며 스스로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으며, 이 책에서는 계급을 건너기 힘든 강으로 말한다. 즉, 엄연한 사회주의자이다. 그러나 당시 사회주의 사상의 주류와는 달랐다. 당시 사회주의 사상은 소련 공산당을 추종하는 스탈린주의와 온건 개혁주의자들인 사회민주주의자가 다수였는데, 오웰은 명백히 반전체주의자로 스탈린주의를 강렬히 비판한다. 사회민주주의자나 기타 좌파 지식인 역시 엘리트주의에 빠져 기층 노동자들의 정서와 괴리되어있음을 말한다. 특히 좌파 지식인들이 위선을 떨며, 대영제국에 비판적일지라도 제국의 해체를 주장하지 않는 일명 입진보들에 대해 강력히 비판한다. 마치 스스로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면서도 국민의 힘과 협력하며 기득권에 복종하는 대표적인 입진보 진중권이 떠오른다. 조지 오웰은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이론과 실천이 분리된 당시 좌파 지식인에 대한 비판이 돋보인다. 오웰 역시 정치적 판단에서 아쉬운 점이 있지만(스탈린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CIA와 협조한 오웰 리스트 작성), 무엇보다 현장에서 글을 써낸 실천적 지식인이다. 자칭 입진보, 혹은 대놓고 권력에 복종하는 지식인들이 판치는 오늘날에 조지 오웰이 그리운 이유이다.      

  오웰은 진실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 기층으로 파고 들어갔다. 노동자들과 하나되어 현실을 담아낸 이 르포타주가 진실하며 훌륭한 계급 의식을 담아낸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다중 위기의 시대, 진정으로 노동자의 편에서 정치적 글을 예술로 승화하는 제2의 조지 오웰을 꿈꾸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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