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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Nov 08. 2024

<이오 카피타노>, 영화로 느끼는 이주민의 고통

 <이오 카피타노>, 영화로 느끼는 이주민의 고통


 지난 10여 년 동안 유럽 공식 정치판에서 끔찍한 변화가 있었다. 도무지 눈 씻고 찾아봐도 존재 가치가 없는 극우 세력의 부상이다. 2000년대 이후 무슬림 혐오 및 이주민 문제가 유럽에서 주요한 사회 담론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자칭 좌파들은 이 문제에 매우 취약한 모습(이주민 유입 문제 논쟁을 회피하거나 타협하기)을 보였고 그 혼란한 틈을 극우가 파고들어 자신들의 정치 입지를 다졌다. 파시스트들과 그 아류 영합주의자들이 주류 정치 세력이 된 슬픈 현상은 이주민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는 '적'이라고 생각한 데에 있다. 그러나 이주민은 적이 아니라 함께 싸워야 할 동지이고, 그들은 타자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적어도 인간 해방을 위해 존재하는 예술로 분류되는 영화라면, 이들의 고통을 우리의 고통으로,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상습적으로 한국 상업 영화가 조선족들을 악마화했던 것과 달리, <이오 카피타노>는 유럽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이주민들이 겪는 고통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우리를 이주민의 '느낌의 공동체' 신형철의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에서 가져왔다.
에 초대하며,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도록 한다.
 영화의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세네갈 출신의 두 청소년이 목숨 건 유럽 이주 여정이다. 세이두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유럽으로 가기를 꿈꾸며 사촌 무사와 돈을 모은다. 하지만 어머니의 반대와 불안감 속에서도 남몰래 출발을 결심한다. 국경을 넘고 리비아로 향하는 여정에서 많은 난관과 위험을 마주하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국경수비대에게 무사는 체포되고, 세이두는 마피아들이 운영하는 리비아 수용소에 갇혀 고문당한다. 꿈에서 무당을 만나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게 되고, 이후 한 남성과 함께 탈출하여 유럽행 보트가 있는 리비아 트리폴리에 도착한다. 세이두는 무사가 감옥에서 탈출해 고통 속에 도착했음을 알고, 무사를 부축하며 치료 방법을 찾는다. 의학적 도움을 구하기 힘들어지자, 세이두는 브로커를 통해 유럽행 보트를 타기로 결심하고 선장이 된다. 수백 명의 목숨을 건 향해에 선장이 된 세이두는 여러 위기를 겪는다. 임산부의 진통, 밀폐된 내부에서 질식 위기, 내부의 다툼 등 여리 위기를 겪지만 리더십을 발휘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결국 배에서는 한 명도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이탈리아에 도착시킨 후, 영화는 세이두의 포효로 막을 내린다.
영화는 작중 단 한 가지 사실을 반복하여 보여준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이주민을 사람이 아닌 사물로 보는 우익들이 간과하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외친다. 정치권에서 최저임금 차등 지급, 인종차별 정책, 이주민 단속 등을 외칠 때, 영화는 단지 여기 사람이 있음을 보여준다. 출신 지역과 민족이 다를 지라도, 여기 사람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보여준다. 이주민에 대해 차별을 가하는 사회이기에, 영화의 반복적인 메세지는 강력하게 다가온다. 때로는 마피아가 행하는 고문이나 사하라 사막에서 낙오자들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도, 삶에 대한 의지로 낙오자들의 비행飛行을 보여주거나 감옥에서 빠져나와 고향으로 돌아가는 영혼의 일시적 귀환을 보여주기도 한다. 실제 이주민들의 여정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몽상과 같은 장치를 통해 처참한 이주민들의 현실을 보여준다.
 <이오 카피타노>는 타인의 고통을 단지 전시하여 연민을 불러오는 영화가 아니다. 여기 사람이 있다는 사실과 이들의 이주에 강건한 의지를 연출하며 이주민을 똑같은 사람으로 재현한다. 어쩌면 당연한 주제이지만, 이주민 차별, 무슬림 혐오가 판치는 지금, 이 영화로 조금이나마 이주민에 대해 느낌의 공동체를 형성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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