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끄러워 하지 않아서 고맙다.
2년 전의 일이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 4학년인 두 딸들의 여름 옷을 사기위해 지역에서 유명한 아울렛 매장을 찾았다.
한창 성장기인 아이들은 "클 때다"하는 어른들의 말씀을 착실하게 눈으로 확인시켜 주고 있었고, 매년 계절이 바뀔 때 마다 옷과 신발을 사며 카드영수증 으로도 재확인 시켜주고 있었다.
에쁜 옷이나 특정 브랜드를 선호하기 보다 입었을 때 편한 옷을 선호하고 옷을 선택하는 데 있어 양보할 수 없는 몇가지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 탓에 하나하나 입어보고 이것저것 따져보고 사야했다. 그래서 아이들과의 쇼핑은 즐겁다기 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에너지 소비가 많은 일이었고 서로 삐침 엔딩도 있었지만,쇼핑을 무사히 끝내고 싶은 두 아이들과 나의 니즈가 같았기에 나름대로 무난히 진행 되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상의를 몇 벌 사고, 청반바지를 사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위해 청바지 전문매장으로 들어갔다.
나는 두 아이들을 앞세우고 여학생이 입을 만한 청반바지를 보여달라 부탁드렸다.
50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 사장님은 마스크 너머의(그 당시는 마스트는 필수 였다) 눈으로 나를 아래위로 쭈~욱 훑어 보셨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말씀하셨다.
순간, 나는 잠시 정신이 아득해 지는 것 같았다.
'내가... 뭘 들은거지?'
찰나의 멍함과 아득함...
이어진 당황해선 안된다는 반사적인 깨달음...
나는 "풉"하고웃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못 살 것 처럼 보이시나 봐요. 알겠습니다."
이것이 손님을 놓친 당신을 향한 비웃음 이란걸 눈치 채길 바라면서,
그런 말에 위축될 사람도 아니고, 화를 낼 만큼 속이 좁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 어필되길 바라면서 옅은 미소로 대답을 했다.
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얼른 그 매장을 돌아서 나왔다.
맞은 편 매장으로 가서 아무렇지 않은 듯, 아무일이 없었다는 듯이 바지를 골랐다.
하지만 머리속은 복잡해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이런 상황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가 가장 걱정스러웠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저런 무시를 당할 만큼 내가 형편이 없나 하는 생각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청바지 전문매장의 여사장님이 아래위로 훑은 나의 옷차림은,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에 색깔별로 5장에 2만원을 주고 인터넷에서 산 역시 검은색 티셔츠 였다. 그리고 대충 어깨에 크로스한 가방까지.
충분히 후줄근해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나는 옷을 잘 입지 못한다.
옷을 잘 입지 못하니 옷을 사는 것도 재미가 없고, 굳이 많은 옷이 필요한 지도 모르겠다.세상에서 제일 귀찮고 기빨리고 힘든 일이 옷쇼핑과 미용실에 가는 것이다. 미용실 에서도 다른 미용시술은 일절 없이 컷트만 하면서도 말이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결혼 전에는 예쁜옷을 사기위해 시간을 내서 쇼핑도 하고, 여러가지 다양한 디자인의 옷을 많이 입었었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다.
어린 아이들을 항상 데리고 다녀야하니 예쁜 옷은 소용이 없었다.
무언가 묻었을 때 빨래하기 쉬운 옷,
언제 어디서든 아이들을 안아 올릴 때 조심스럽지 않은 옷,
아이가 내옷을 잡아당겨 늘어나도 전혀 신경쓰이지 않는 옷. 그런 옷들이 내가 입는 옷들의 기준이 되었다.
이렇게 입다보니 너무나 편해서 아이들이 다 자란 지금까지도 "세탁기 빨래 가능하고 저렴하며 편한 옷"이 구매의 1순위이다.
옷차림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양육비, 교육비 등의 지출이 적지 않았다.
아무리 맞벌이라지만 지출이 늘고 수입은 한정이 되어 있으니 덜 중요한 것, 덜 필요한 것에는 돈을 아끼게 된 것이다.
언젠가 큰 딸이 자신이 작아져서 신지 못하는 신발을 빨아서 신고 다니는 나를 보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엄마는 왜 엄마신발 안 사? 그건 내 신발이지 엄마 신발이 아니잖아. 그리고 옷은 왜 안사? 맨날 옷 두세벌로 번갈아 입잖아."
질문이었지만, 답답한 엄마에 대한 질책으로 들렸었다.
그때는 아무렇지 않게 신발은 아직 충분히 신을만 하고 옷은 엄마에게 그다지 중요한게 아니니 많지 않아도 된다 라고만 이야기 했었다.
멋쟁이 친언니와 친한 친구들로 부터 "옷을 너무 편하게만 대충 입고 다니는 거 아니냐?" 라는 걱정 섞인 질문을 받기도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겼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아무 걱정없이 한번에 몇권이나 구입할 수 있고,아이들에게 필요한 것,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 데에 주저함이 없으니 옷장에 옷이 몇벌 없고, 명품가방 하나 없이 주구장창 천가방만 메고 다녀도 항상 당당했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을 당하니, 아니 무시를 당하니 내가 느낀 당당함은 순수히 나 혼자만의 것이었구나 싶었다.
쇼핑을 마치고 아이들과 돌아가는 차안에서 청바지 매장에서의 일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다.
다행히 아이들은 그 상황을 부끄러워 하거나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무시 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화를 내거나,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걸 증명하기 위해서 그 가게에서 옷을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감정에 휘둘려서가 아닌 신중하게 소비를 하는게 중요해.
그리고, 그런식으로 매장에서 쫓겨나다시피 해서 너희들이 엄마를 부끄러워 하게 될까봐 쭉 걱정을 했어."
"아니야, 그 사장님이 그러면 안되지.겉모습만 보고 그렇게 사람을 무시하면 안되잖아."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또한 나름대로 잘잘못을 판단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특하기 까지 했다. 걱정을 내려놓았고, 게다가 살짝 신이 난 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얘들아, 우리 집에 자원은 한정되어 있어. 그런데 쓸 곳은 많아. 그러면 덜 중요한 것에는 아끼고 더 중요한 것에는 충분히 쓰는게 맞겠지? 엄마아빠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자원을 더 쓰기 위해서 덜 중요한 것에는 자원을 아끼는 거야.좋은 책을 사고, 가족들과의 즐거운 시간을 위해서 캠핑을 다니고, 너희들의 건강을 위해서 안과검진, 치과검진을 받아서 제때에 맞는 치료를 하는건 중요한 일이야. 하지만 상대적으로 엄마가 꾸미는 건 엄마에겐 덜 중요한 일이야.
사람마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다르기 때문에 자원을 어디에 쓰느냐도 달라져. 그리고 그건 취향의 문제이기 때문에 누가 맞고 틀리다고 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야. 엄마도 오늘 일은 많이 기분이 나쁘지만 그렇다고 엄마가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거든. 너희들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줘서 너무 다행스럽기도 하고."
"하나도 안 부끄러운데.~"
밝게 대답하는 아이들을 보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황당한 일을 겪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이들과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였다 생각하니
새삼 그 여사장님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고맙게도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