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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푼젤 Mar 27. 2022

하늘 아래 같은 재고는 없다.

어서 와, 재고실사는 처음이지? -  부록  -

하늘 아래 같은 레드는 없다.

뷰티 업계에서 다양한 붉은 계열 립스틱 색깔을 칭하며 자주 사용하는 문구이다. 나는 오늘 글에서 이 문구를 조금 다르게 쓰고 싶다.

하늘 아래 같은 재고는 없다


'재고자산'이라고 하면 어떤 것이 머릿속에 그려지는가? 대부분 창고나 공장 한 귀퉁이에 가득 쌓인 박스더미 따위를 떠올릴 것이다. 나 역시 회계법인에 입사하기 전, 책으로 회계감사를 배울 때에는 기껏해야 자동차나 각종 전자제품, 철근 따위를 생각해낼 뿐이었다.


몸으로 직접 부딪쳐야 하는 재고 실사가 고되긴 하지만, 다양한 회사의 특별한 재고자산을 경험하는 것은 새롭고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내가 직접 경험하거나 들은 특별한 종류의 재고자산들을 몇 가지 정리해보았다.


1) 공장 실사

공장에서의 실물 실사는 회계사들이 한두 번씩은 꼭 경험하는 가장 흔한 종류의 실사이다. 재고실사는 사실 회계감사를 할 때뿐 아니라 매각이나 인수를 위한 실사를 진행할 때도 반드시 수행되어야 하는 절차다. 재고자산은 그 금액적 비중이 클 뿐 아니라 진부화나 분실이 쉽게 일어나고, 회사의 분식이나 부정을 위해 가장 손쉽게 이용되는 계정이기 때문이다.


아래 사진들은 구조조정 부서에서 매각 실사(회사를 팔 기 위한 실사)를 했을 때, 그리고 회생기업의 실사가치 및 청산가치 산정을 위한 재고 실사를 했을 때의 사진들이다. 거중기에 머리를 부딪치기도 하고, 기계에서 나오는 열들로 인해 땀이 뻘뻘 나기도 했지만, 책상에만 앉아있는 내가 평소에는 할 수 없는 경험인지라 특별하게 느껴졌다.

사진에선 밝게 웃고 있지만, 실사가 이뤄진 날은 무려 8월. 가장 더위가 심했던 때라 안전모를 벗으면 땀이 후두둑 떨어졌다.
안전모와 안경, 안전화를 착용한 내 모습을 동료 회계사님이 찍어주셨다. 공장에 여성 직원이 없어 내 발 사이즈(235)에 맞는 안전화가 없어 250 사이즈를 신었다.


2) 부동산 실사

부동산업을 영위하는 회사의 재고는 무엇일까? 당연히 땅과 건물이다. 오피스텔을 분양하는 회사의 재고실사를 맡은 적이 있었는데, 실사를 위해 하루 종일 회사 담당자분들과 강남역 인근의 오피스텔을 돌아다녔다. 오피스텔 실사는 사실 어려울 것도 없고, 가격 정보와 주변 시세, 여러 가지 타입의 오피스텔 구조에 대한 설명을 듣는 재미가 매우 쏠쏠했다.


내가 감사를 맡은 회사 중에는 부동산 개발업을 영위하는 회사도 있었는데, 그 회사의 재고자산은 개발을 위해 사 둔 여러 지역의 땅들이었고, 그중에는 테마파크를 조성하기 위해 보유 중인 무인도도 있었다. 내가 직접 실사를 가진 않았지만, 첫 감사 시기에는 실존 여부 확인을 위해 배를 타고 무인도로 들어가 직접 확인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그 무인도가 어떻게 개발되었는지 궁금해져 검색해보았으나 아직 별다른 진전사항이 없는 듯하다.


3) 은행 금고 실사

금고에서 엄청난 양의 돈뭉치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중은행의 현금 실사는 일반 회사의 현금 실사와는 스케일 자체가 다르다. 돈을 세다 지쳐 잠드는 꿈을 꾸었던 미생으로서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실사였지만, 아쉽게도 나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우리 부서는 당시 '우리은행'과 '외환은행'을 감사 중이었는데, 외환은행 감사팀의 경우 도쿄와 싱가포르 등 해외 각 지사로 현금 실사를 가기도 했다.


비교적 업무강도가 낮은 현금 실사를, 그것도 멋진 해외 도시에서 한다니...! 사실 짧은 일정이다 보니 마냥 부러워할 일은 아니지만, 그 당시 어린 마음(?)에 싱가포르로 현금 실사를 간 동료 회계사님을 엄청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4) 명품 재고 실사

재고실사 시즌 가장 인기 있는 실사는 뭐니 뭐니 해도 명품회사의 재고실사다. 어차피 하루 종일 재고를 세어야 한다면, 다이소에서 1,000원짜리 주방용품을 세는 것보다 에르메스 창고에서 드림백들을 세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니까.


우리 부서에선 '루이뷔통'과 '에르메네질도 제냐'를 감사하고 있었는데, 엄청 예쁘고 세련된 여자 회계사님이 루이비통의 회계감사와 재고실사를 담당하셨다. 패션에 관심이 많고 명품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여 루이뷔통 실사에 매우 적합해 보이시는 분이었고, 나도 언젠가 그분처럼 명품회사의 재고실사를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에르메스나 샤넬, 루이뷔통 등 콧대 높은 명품 브랜드들도 국내 외감법에 따라 감사를 받아야 한다. 몇몇 브랜드들은 '주식회사' 대신 '유한회사'로 법인형태를 바꿔 외감법 규정을 피해 가기도 했었으나, 몇 년 전 법 개정으로 일정 규모 이상의 유한회사는 주식회사에 준하는 외부감사를 받고 자료를 공개해야 한다.


5) 개성공단 출장

현대아산은 우리 부서의 주요 고객 중 하나였는데, 알다시피 현대아산은 '금강산 관광지'와 '개성 산업단지'를 운영하는 기업이다.


내가 감사부서에 있던 당시 금강산 사업은 이미 중단된 상태였으나, 개성공단은 한창 영업 중이었고, 개성공단 내 재고자산의 금액적 중요성이 높아 재고실사가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건널 수 없는 땅이라 할지라도, 회계감사를 위해선 실물 실사가 꼭 필요하기에 매년 회계사 한분이 남북출입사무소를 통해 개성으로 '출경'하여 재고실사를 해야 했다. 조금 무섭긴 하지만, 북한 땅을 밟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경험이기에 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실사였다.


6) 기타 

재고실사 시즌에는 정말 다양한 장소로 갖가지 재고를 세기 위해 출동한다. 식재료 재고를 확인하기 위해 냉동실에서 손발 꽁꽁 얼어가며 실사를 하기도 하고, 냄새나는 축사에서 돼지나 닭 등 살아 움직이는 재고를 힘겹게 세어야 하는 일도 생긴다. 대우조선해양 사건 이후에는 수주산업의 현장 실사 중요성이 높아져 배의 실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중국 등으로 직접 출장을 가는 경우도 많아졌다고 한다.


물론 말처럼 즐겁기만 한 일은 아니지만, 이처럼 다양한 산업을 두루두루 경험할 수 있는 직업이 또 있을까? 매사에 호기심 넘치는 ENFP(간혹 ENTP)는 재고실사 기간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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