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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푼젤 Apr 17. 2022

회계사도 '시즌'에 연애가 가능할까?

야근, 어디까지 해봤니?


감사팀의 회계사들은 1년 중 가장 바쁜 시기를 일컬어 '시즌(season)'이라 부른다. 참 아름답고 예쁜 단어이지만, 회계사들에게 시즌은 일반인의 상상 그 이상으로 춥고 팍팍하다. 회계사들의 '시즌'은 보통 1월에 시작해 3월 말에 끝을 맺고, 2월 초중순부터 3월 초중순까지의 시기에 정점을 찍는다.


회계사도 '시즌'에 연애가 가능할까? 우스갯소리 같지만,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겠다. 시즌 동안 무수히 많은 연인들의 다툼과 이별을 목격했고, 나 역시 크리스마스에 시작했던 연인과 시즌 도중 헤어진 적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군대를 기다려준 연인들의 사랑과 희생에는 비할 바가 아니지만, 나는 회계사의 시즌을 묵묵히 버텨내 준 연인들에게도 존경을 표하고 싶다. 특히 20대 중후반,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에게 회계사의 '시즌'은 너무도 가혹하고, 이해되지 않는 일 투성이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 피어오르는 청춘들에게 3개월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시즌의 정점에서 나의 소박했던, 하지만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소망은 '출근한 날, 퇴근하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오늘 밤 12시 안에 퇴근하는 것'이 매일의 작은 목표였다. 시즌 중 평균적인 퇴근 시각은 대략 새벽 두세 시쯤, 늘 자정을 한참 넘긴 새벽녘에서야 퇴근이 가능했다. 조금 이른 날은 1시 부근이 되기도 하고, 또 많이 늦은 날은 4-5시가 되기도 지만, 12시 이전에 퇴근하는 날은 손에 꼽힐 정도로 많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사계절 중 겨울을 가장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꽃이 흐드러지는 봄이나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 내가 사랑하는 그 계절들에 매일 사무실에 박혀 야근을 하고 새벽이슬 밟으며 퇴근해야 했다면, 나는 서글퍼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추위도 많이 타고 겨울 스포츠를 전혀 즐기지 않기에 시즌 간 감옥살이가 이 계절이라는 것이 때때로 감사했다.


하지만, 시즌이 겨울이기에 더욱 혹독했던 것도 사실이다. 매서운 추위와 싸워내며, 눈보라를 맞으며, 잔뜩 살이 찐 노트북 가방을 짊어진 채 매일 집에서 필드로, 필드에서 여의도 사무실로 옮겨 다녀야 했다. 고객사의 사무실(필드)에서 새벽까지 야근하는 것은 몸도 마음도 편치 않기에, 적당한 시간까지 첫 번째 야근을 마친 후 필드를 나와 여의도 사무실로 두 번째 출근을 하는 날이 많았다.


고객사 분들과 얼큰하게 회식을 마친 후에도,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선 꾸역꾸역 여의도 사무실로 두 번째 출근을 해내곤 했다. 저녁 시간이 지날 때쯤이면 술에 취하거나 일에 취하거나 한 사람들이 하나 둘 여의도 사무실로 모여들었다. 시즌의 정점이 되면 새벽 1-2시에도 마치 낮 1-2시 마냥 사무실 구석구석 사람이 바글거렸고, 온갖 에너지 드링크 냄새와 술 냄새가 한데 뒤섞여 진동했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사람들의 책상엔 너덧개의 에너지 드링크와 캔커피가 쌓여갔고, 다들 악을 쓰며 수명을 갈아 넣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즌 기간에는 너도나도 예민해진다. 선임 회계사들의 뾰족하게 날 선 말들이 비수가 되어 꽂히고, 매일 아슬아슬하게 데드라인을 맞추다 보면 한껏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다. 시즌의 혹독함을 글로만 배웠던 새내기 회계사들에겐 매 순간이 당황스러움의 연속이다. 연인들의 카톡에 짧은 답장을 하는 것도, 안부 전화를 받아내는 것도 어느 순간 버거워진다.


연인들은 그렇게 바쁘다는 와중에 회식을 하고, 술에 취하고, 또 취한 와중에 여의도 사무실로 다시금 기어가는 회계사를 이해할 수 없다. 연인들의 단골 멘트는 '담배 피우는 시간에, 화장실 가는 시간에 답장 한 통은 할 수 있잖아'다. 물론 담배도 태우고 화장실도 가고, 종종 동료들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는 시간도 있겠지만, 가벼운 답장도 정신적 여유가 없는 이들에겐 중한 감정노동이 되고 만다. 그리고 또 정말 솔직히는 카톡이 왔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거나, 또 더 솔직히는 그 잠시 쉬는 시간에 또 다른 일(처럼 느껴지는 일)을 하는 것이 스트레스가 되어버린다.


야근 후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집에 데려다주겠다는 연인의 배려가 부담으로 느껴졌다. 그냥 택시에 몸을 뉘이고 아무 방해 없이 집으로 실려가고 싶었다. 연인의 차에서 고마움을 표현하고, 대화를 주고받아야 하는 그 작은 의무조차 부담스럽게 느껴졌고, 어느 순간 나에게 일 외에 또 다른 의무의 대상이 있다는 것이 너무도 버거워 이별을 고하게 되었다. 결국 문제는 '사랑의 부족'이었겠지만, 시즌 한가운데에서 허우적거리던 병아리 회계사에겐 사랑을 키워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새벽 두어 시경 여의도 사무실(one IFC) 앞 풍경. 모범택시와 일반택시가 끝도 없이 줄 서있다.
위 택시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동기들의 웃픈 댓글이 달렸다.



새벽녘에 사무실 밖으로 나서면 택시가 끝도 없이 줄 서 있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살면서 이렇게 긴 모범택시 줄은 공항에서도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어느 하루는 택시를 탔더니, 기사님께서 대체 이 빌딩에 얼마나 큰 유흥업소가 있는 거냐 물으셨다.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던 중 하도 택시가 많기에 남들 따라 한번 줄을 서보셨다는 것이었다. 시즌을 버텨내고 있던 내 꼴은 클럽과는 거리가 한참 먼 모양새였지만, 이곳은 클럽 못지않게 이른 아침까지 사람이 붐비는 곳이라고, 나를 내려주시고 다시 돌아가도 그곳은 아직 한창일 거라 말씀드렸다. 시즌의 정점에서 회계법인 사무실 앞은, 그야말로 택시기사님들의 '핫플'이었다.


폭설이 내렸던 어느 날 새벽 5시. 택시가 없어 결국 아빠에게 SOS를 쳤다.


택시를 타고 퇴근하던 길에 '이대로 사고가 나서 병원에 몇 주 누워있으면 좋겠다'는 끔찍한 생각을 종종, 사실은 꽤 자주 했다. 발목이 부러져 철심을 박는 수술을 하게 된 동기 언니를 감히 부러워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싶은데, 그 당시엔 참으로 진지하고 절박했다.


새벽까지 야근을 하고 두어 시간 겨우 눈을 붙이고 일어나 샤워를 하는데, 뒷목이 뻣뻣해지고 눈이 아득해져 이대로 죽는 건가? 싶었던 적도 있었다. 새벽녘 산더미 같은 리뷰(수정사항)를 받고선 육성으로 소리 내어 엉엉 울면서 노트북을 밀쳐냈다가 행여나 정말 노트북이 고장이라도 났을까 봐 다시 주섬주섬 지질하게 노트북을 주워올렸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 계절도 결국 끝이 나고, 봄은 이윽고 찾아왔다. 그토록 끔찍했던 기억들도 이렇게 추억 한 스푼이 더해져 한낱 글 소재가 되었다. 한가한 비시즌엔 언제 우리에게 시즌이라는 것이 있었냐는 듯, 길고 긴 여행도 떠나고 마음껏 땡땡이도 치며 여유를 만끽했다. 그렇게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다시금 새로운 시즌 시작되었다.


나는 그러하지 못했지만, 시즌에도 누군가의 사랑은 계속되고, 누군가의 사랑은 더 단단해지고, 또 누군가는 그 사랑의 결실을 맺다. 그 바쁜 시즌에 소개팅을 해서 잘 사귀고 심지어 결혼까지 골인한 동기도 있었다. 팍팍한 시즌, 누군가에겐 연인의 존재가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겐 든든한 버팀목과 쉼터가 되기도 한다. 한참 모자랐던 나의  뉴스텝 시절을 회상하며 쓴 이 길고 긴 푸념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또 누군가에게는 다짐이 되었으면 좋겠다.




코로나 시국엔 고객사와의 회식이 없어 그나마 시즌이 좀 더 버틸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계속되는 회식과 야근의 콜라보는 말 그대로 지옥이거든요. 회식에 관한 이야기도 다음에 해보려 하는데, 코로나 덕분에 전반적인 분위기가 (긍정적인 쪽으로) 많이 변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즐거운 회계법인 생활을 했다고 자부하는 저에게도, 시즌의 고통은 아직도 저릿하게 생생합니다. 올해도 힘겨운 시즌을 무사히 버텨낸 수많은 회계사님들께 존경의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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