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푼젤 May 07. 2022

저기요, 선생님?

호칭에 깃든 조직문화


회계법인의 조직문화는 꽤 수평적인 편이다. 물론 연차에 따른 나름의 직급과 상하관계는 있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가능하고, 구성원 간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한 조직문화는 호칭에서도 드러난다. 일부 외국계 회사나 진보적인 스타트업처럼 서로 영어 이름을 부르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한국 토종(?) 회사들처럼 딱딱하지는 않다.


내가 몸 담았던 안진회계법인을 비롯한 많은 회계법인들의 기본적인 호칭은 '선생님'이다. 윗 연차를 부를 때도 아래 연차를 부를 때도 '선생님'이고, 조금 더 친해지면 위아래 구분 없이 '쌤'이라 부른다. '정소영 선생님', '정 선생님'이라고 부르다가 '정쌤', 혹은 그냥 '쌤'이 되는 식이다.


반면 삼정회계법인의 경우에는 기본적인 호칭이 '회계사님'이다. 팀마다 다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안진이 삼정에 비해 조직문화가 덜 경직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러한 분위기가 호칭과도 관련이 있어 보다. 익숙함의 차이일 수 있지만 나는 회계사님이 선생님보다 왠지 더 딱딱해 보인다.



나는 입사한 날 노트북과 사원증을 지급받고, 바로 다음 날 회사생활에 대한 아무런 안내도 없이 곧장 업무에 투입되었다. 출근하자마자 옆 자리에 앉은 다른 여자 회계사님이 이것저것 내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셨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다 질문할 거리가 생겨 순간 아무 생각 없이 '언니'라고 불렀는데, 뭔가 잘못된 것을 느꼈다. 일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언..니가 아닌가? 설마 나보다 어린가?????


비전공자에다 회계사 수험생 계의 아싸(?)였던 나는 법인 생활에 대해 이야기해 줄 선배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당연히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대해 알 턱이 없었다. 나보다 나이가 살짝 많아 보이시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는 입사가 매우 빠른 편이었기에 나보다 더 어린 사람은 회계법인에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당연히 언니잖아... 뭐가 문제지? 첫날 사무실에서는 본부장님과 비서분들 외엔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으니, 그분이 내가 법인에서 대화를 나눈 첫 동료였다. 입을 뗄 때 호칭에 대한 고민은 살짝 있었지만, '저기요'보단 '언니'가 낫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그 쌤이 나를 조용히 불러 사석에선 그리 불러도 되지만, 업무 중 언니라는 호칭은 적절하지 않다고 일러주셨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되는지 조심스럽게 여쭤봤더니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라고 하셨다. 우리가 교직에 있는 것도 아닌데,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왠지 좀 오글거렸다. 부르는 것도 불리는 것도 어색했다. 하지만 며칠만 지나니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금세 익숙해졌다. 이후 사석이나 술자리에서도 그 선생님을 '언니'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감사부서에서 FAS(Financial Advisory Services)로 옮겨간 후에는 호칭에도 살짝 변화가 생겼다. 감사부서는 영어 직급을 사용했는데, FAS는 한글 직급을 사용했고, 명함에도 한글 직급이 박혔다. 같은 연차에서 아래와 같이 호칭이 달라졌다.  

<감사팀>
Staff(1~2년 차) - Senior(3~5년 차) - Manager(6~8년 차) - Senior Manager(9~11년 차) - 이사 - 상무

<FAS팀>
Staff(1~2년 차) - 과장(3~5년 차) - 차장(6~8년 차) - 부장(9~11년 차) - 이사 - 상무


'시니어님' , '매니저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색하기에 감사부서엔 너도 나도 다 '선생님'으로 통일해 부르지만, FAS에선 부르기 좋고 입에 착 붙는 직급이 생겨버린 것이다. 아랫사람은 윗 연차를 부를 때 '선생님(쌤)'이라고 부르기보다 '과장님', '차장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친하지 않거나 연차 차이가 많이 나는 경우엔 더욱이 그랬다.  '선생님'이나 '쌤'이라는 호칭과 섞어서 부르기도 하고, 친해지면 가볍게 '쌤'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감사팀과는 분위기가 확실히 달랐다.


퇴사한 지 5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도 과거 친했던 쌤들을 만나면 나를 '차장님'이라고 부른다. 퇴사했기에 나는 승진 없이 그분들께 영원히 차장님인 것이다. 나도 그분들을 여전히 쌤이라고 부른다. 같은 팀에 동갑이었던 여자 쌤이 있었고 꽤 가깝게 지냈지만, 나와 연차가 달라 서로 '쌤'이라고 불렀다. 퇴사 후 술자리에서 반쯤 취해 우리 서로 이제 이름을 부르자며 '소영아' 'OO야'하기로 약속을 했지만, 바로 다음날 다시 'OO쌤'이라는 호칭으로 돌아가 버렸다. 몇 년 간 입에 붙었던 '쌤'이라는 호칭을 떼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회계법인은 일반적인 기업들과 달리 직급체계가 상향 평준화되어있다. 3년 차면 벌써 과장이라 FAS로 옮겨간 후 25살에 과장이 되었고, 28살엔 차장이 되어버렸다. 클라이언트를 만날 때 항상 정장 차림에 호칭까지 그렇다 보니 내 나이가 엄청 많다고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호칭 때문이라 믿고 싶다...) 고작 27-28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파워 오지라퍼(+무례한) 분들에게 왜 결혼 안 하느냐, 아기 안 낳느냐 등의 채근을 엄청 받아야 했다.


이러한 직급체계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도 있다. 회계법인엔 조기 승진이나 승진 누락이 거의 없어 (이사나 상무로의 승진 제외) 그냥 연차가 차면 자동으로 과장이 되고 차장이 된다. 그러니 당연히 축하받을 일도 아니고 물 흐르듯 아주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그런데 내가 차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상무님께 들은 클라이언트사 대표님께서 축하의 의미로 난을 사무실로 보내주셨다. 아마 회계법인 역사 상 우리 법인에서 차장이 되어 난을 받은 사람은 내가 유일할 것이다. 정말 저 난 때문에 놀림을 엄청 받았고, 집에 가져갈 때도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다.

물론 엄마는 좋아하셨고, 그 모습을 보고 나도 행복했다. 엄마는 아주 오래도록 저 난을 정성을 다해 키워주셨다. 어쩌면 지금도 친정 집에 있을 수도 있음;;;; ㅌ건설사 대표님, 감사했습니다!
웃겨서 올린 글이지만, 어린 마음에 '차장'이라는 직급이 꽤 뿌듯해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선생님' 혹은 ' 회계사님'이라는 호칭이 퍽 좋았다. 그 호칭 자체가 좋았다기보단 호칭에 깃든 '존중'이 좋았다. 승진도 느려 터진 것보단 당연히 빠른 게 좋았고, '차장님'이라 불리는 게 나쁠 리 없었다. 다만 어느 부서든 간에 이사나 상무로의 승진은 쉽지 않다. '부장'까지만 프리패스가 허용되는 셈이다. 이사나 상무로의 승진에 실패하면 회계법인에 남아 다음 기회를 노릴지, 개업을 해서 나가거나 로컬로 옮길지 결정해야 한다. 승진이 빠르다는 것은 그만큼 회사를 떠나야 할 기로에 빨리 서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세상사가 그러하듯 양날의 검이다.


이 글에 등장하신 분들... 다들 잘 지내시죠...?

매거진의 이전글 회계사도 '시즌'에 연애가 가능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