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수많은 국내 출장 경험으로 회계법인의 출장이 얼마나 녹록지 않은 지 잘 알면서도, 주책맞게 설레는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미국 출장이잖아, 실리콘밸리잖아! 천안이나 포항 출장과는 당연히 다를 것 같았다.
출장 통보를 받은 후 출국까지 단 4일. 시즌 중 떠나는 출장이었기에, 걸려있는 일들이 많았다. 이미 엄청난 야근 폭풍 속을 거닐고 있었지만, 즐거운 출장을 위해 잠을 줄이고 시간을 쪼갰다. 미국에서 온전히 프로젝트에 집중하려면(이라고 쓰고, '미국에서 관광도 좀 하려면'으로 읽는다.) 최대한 여기에서의 일들을 마무리하고 가야 했다.
미국에서 머무는 시간은 총 6일. 나흘의 필드웤(field-work)이 계획되어 있으니 최소한 하루 이틀 정도는 휴식과 관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출장지인 마운틴뷰에서 차로 약 1시간 남짓만 가면 샌프란시스코였다. 함께 가는 쌤들도 회계사이기 이전에 사람(?)이신데, 천국의 도시인 샌프란시스코를 마냥 외면할 순 없으시겠지. 그래서 애초에 출장 일정을 설날에 붙이신 듯했다. 설날을 온전히 쉬지 못하는경우도 더러 있긴 하지만, 그래도 설 연휴 만큼은 다들 푹 쉬는 분위기이기에 업무를 짧고 화끈하게(?) 끝낸 후 설 연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출장 인원은 총 4명. 벤처캐피털 투자사인 소프트뱅크의 외주를 받아 진행하는 실사 업무인지라 담당 심사역 한 분과 현지에서 합류하기로 했고, 우리 회사에서는 나를 포함하여 3명이 투입되었다. 나와 15살 정도 차이 나는 이사님 한 분과 10살 조금 넘게 차이가 나는 매니저쌤 한 분이었다. 겨우 2년 차였던 내겐 마냥 어려운 분들이었고, 친하기는 커녕 함께 일을 해본 적도 없었다. 연차로 보나 나이로 보나 나는 온갖 잡무를 도맡아야 할 게 뻔했다.
그럼 뭐 어떤가. 한국에서의 업무도 팍팍하긴 마찬가지인 것을. 천안에서 호두과자 먹으며 야근하는 것보단 미국에서 햄버거 먹으며 야근하는 게 훨씬 낫지. 나는 묵묵히 나의 출장을 즐기면 그뿐이다.
나의 첫 번째 임무는 비행기표 예약이었다. 분명 출장을 위한 예약인데, 여행을 계획하듯 신이 났다. 다들 창가 자리를 좋아하시겠지. 비즈니스도 아닌데, 좁아터진 이코노미에 셋이 쪼르륵 앉아 가는 건 좀 웃기고 불편하잖아...? 행여라도 셋이 나란히 앉아 가게 된다면 당연히 가운데 자리는 내 몫이 될 터인데...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1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불편한 두 분 사이에 낑겨 갈 것을 생각하면 좀 끔찍했다. 다행히 좌석 선택에 여유가 있어 각각 다른 열의 창가 자리로 좌석 지정을 하고, 내 자리는 조금 떨어뜨렸다. 그분들도 회사 동료들과 살 부대끼며 쪼르륵 앉아가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주어진 가격대에서 적당한 호텔도 예약했다. 필드웤 장소 주변의 괜찮은 호텔들의 후기를 모조리 읽어보고 심혈을 기울여 선택했다. 야무진(?) 나는 호텔스닷컴에서 방 3개 × 5박을 모두 내 계정으로 예약했다. 무료 숙박이 하나 생기고도 남을 숙박 수였다.
대망의 면세점 쇼핑도 빼놓지 않았다. 해외 출장이 좋은 또 하나의 이유는 퍼디엠(per diem, 출장 시 하루 단위로 지원되는 일일 경비)이 국내 출장에 비해 매우 쏠쏠하다는 것이다. 국내 출장의 경우 1일에 겨우 2만 원(현재는 3만 원으로 상승되었다.)이 지원되지만, 해외 출장의 경우에는 1일 당 지역에 따라 10-20만 원 가까이를 지원해준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내가 받을 퍼디엠을 땡겨(?) 인터넷 면세점에서 비싼 화장품들을 잔뜩 장바구니에 담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하고 있는 지인에게 연락을 했더니 고맙게도 하루 시간을 내어 샌프란시스코 알짜배기 관광을 시켜주겠다 했다. 게다가 내가 있는 마운틴뷰까지 픽업을 와주고, 맛집도 미리 알아봐 놓겠단다.
정말 여기까진 모든 것이 장밋빛이었다. 계획은 이다지도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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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렇게 기다리던 출장 날. 체크인 카운터에서 나의 장밋빛 꿈은 보란 듯이 깨어졌다.
"정 회계사, 자리를 왜 이렇게 다 떨어뜨려 놓았어?"
"아... 피곤하실 테니 푹 주무시고 해야 하는데, 제가 옆에 있으면 불편하실 것 같아서요^^;;"
"에이 무슨 소리야. 옆에 뚱~뚱한 아저씨라도 앉으면 어떡해? 일행인데 우리 다 같이 붙어 앉아야지"
"아... 그게..."
"그리고 자긴 뭘 자?! 미국 가서 놀려면 비행기에서 열심히 일해야지!! 명세서 다 훑어보고 왔지? 졸리면 우리가 깨워줄게, 걱정 마!!"
아.. 걱정은 무슨 걱정이요... 여러 말들이 턱 끝에 차올랐지만, 꾹 참았다. 더 이상의 저항은 의미가 없어 보여 내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결국 나는 가장 마르고(?) 건강하다는 이유로 두 선생님들 사이 가운데 자리로 배정이 되었다. 두 분이 떡하니 양 팔걸이를 차지하셨고, 애석하게도 내 팔걸이는 없었다. 팔걸이에 살짝 팔꿈치를 올려보았지만, 두 분의 지지는 생각보다 견고했다.
괜찮아... 공짜로 샌프란시스코 가는 길이 조금 고되네. 까짓 껏 10시간만 쥐 죽은 듯이 가자 싶었다. 하지만 비행기에서 일을 하라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숨소리조차 성가시게 느껴지는 지척 거리에서의 감시를 양 옆에서 받으며 명세서를 검토하고 실사 총괄표를 만들었다.
망할 대한항공은 대체 누굴 위해 비행기 안에 콘센트를 만들었나... 노트북을 빨리 꺼지게 하려고 눈 아프지만 밝기를 최대로 키운 채 작업을 했는데, '친절하신' 이사님이 승무원을 불러 콘센트를 찾아내셨다. 꼬박 10시간이 넘는 내내 그렇게 불편하게, 비효율적으로 일을 하며 미국에 와닿았다. 중간에 1-2시간 정도 잠깐 눈을 붙일 수 있긴 했는데, 내가 잔 건지 안 잔 건지 조차 아리송할 정도로 몽롱하고 피곤했다.
비행 내내 창 밖으로 뛰어내려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하지만 참아야지. 나는 지금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이니까. 조금만 참자... 하지만 이 불길한 예감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