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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라라 Jan 19. 2021

펑펑 내리던 눈과 함께 온 우리 아가, 설雪

보고 싶었어

아기가 나올 기미가 안 보인다고 푸념 글을 올린 다음 날, 거짓말처럼 양수가 터졌다. 밖으론 굵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17일, 평소답지 않게 밥도 대충 챙겨 먹고 낮잠을 늘어지게 자다가, 내일 눈이 온다는 소식에 남편과 주섬주섬 저녁 산책을 나섰다. 늦게 나온 탓인지 이미 눈발이 조금씩 날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만 간신히 보이던 얇은 눈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굵어졌다. 우리가 아가 태명을 설이라고 지어서 올해 이렇게 눈이 많이 오나 봐. 내일 눈이 많이 온다는데, 왠지 이도 같이 와줄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이상하지.



18일,

8시 15분, 출근하는 남편의 사부작 소리에 눈을 떴는데 물 같은 게 울컥하고 나온 기분이 들었다. 화장실에 가보니 피가 방울방울 떨어져 있었다. 이슬인지 양수인지 알 수 없었지만, 곧 아가를 본다는 생각에 설레기 시작했다. 역아였을 때 잡아둔 제왕수술 날이 마침 오늘이었는데, 아가가 자기 나올 날을 아는 건가 싶기도 했다.


9시 20분, 병원에 전화해 코로나 검사 음성이 떴다고 이야기하고, 아침에 일어난 일을 설명했다. 진통 시작되면 오세요, 라는 시큰둥한 답을 들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간호사가 빨리 병원에 오라고 했다. 어라, 아직 진통도 없고 물도 많이 안 새는데, 저녁에 남편 퇴근하고 내원하면 안 되나요? 순진한 물음에 간호사가 당황해하며 어서 오라고 채근했다.


10시, 급히 조퇴한 남편과 함께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보니 양수가 새는 게 맞았다. 수치 12 이상이 정상인데 3 밖에 안 된다고, 입원하라고 했다. 얼떨떨한 와중에 양수가 너무 적어 아가가 힘들까 봐 걱정이 됐다. 사실 나는 너무 멀쩡했다.



11시, 입원 수속을 마치고 병실에 들어가 내진과 관장을 했다. 이미 2센티가 열려 있었고, 진통도 조금씩 있다고 했다. 배가 정말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서 진통이 있다는 말에 놀랐다. 유도 촉진제를 조금씩 맞기 시작했고 물 포함 금식을 당했다. 아, 아침을 좀 더 든든히 먹고 올걸.


2시, 담당의가 와서 아직도 2센티라고, 원칙대로면 내일까지 유도를 해보는 게 맞는데 수술을 원하면 해주겠다고 했다. 골반 입구가 좁기도 하고 저번 진료 때 내가 진통을 오래 견딜 생각이 없다고 이미 말한 터라 먼저 권해주는 것이었다.


몇 달 전의 나라면 고민 없이 수술을 택했을 텐데, 이상하게 좀 더 기다려보고 싶었다. 역아였던 아가가 돌기도 했고, 머리 크기도 많이 크지 않아 왠지 자연분만으로 낳을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리고 이때만 해도 별로 안 아파서 2일은 거뜬히 견딜 수 있을 거 같기도 했다. 남편은 괜한 고생 말라며 수술을 권했고, 고민하다 2시간만 더 기다려보다 진행이 안 되면 수술하기로 했다.



2시 20분, 진통이 5분 간격으로 오다가 점점 간격이 짧아지고 강도가 세졌다. 약발이 들고 있었다.

3시 10분, 내진을 해보니 자궁문이 2.5센티로 조금 열려 가족 분만실로 향했다. 수술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말 자연분만을 하는 걸까?


4시, 3센티가 열렸다. 이쯤 되니 진통 주기가 1분으로 짧아졌다. 가끔씩 4분 쉴 때는 선잠을 자다가 진통 때문에 다시 깼다. 가장 최악이라는 허리 진통으로 와서 등허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무통 약을 놓기 위한 척추 주사를 꼽으며 조금 무서웠다.

4시 50분, 4센티가 열려 드디어 무통 약을 맞을 수 있게 되었다. 경부가 아직 두꺼우니 30분 더 참을 수 있냐는 말에 알겠다고 했는데, 이후로 너무 아파서 더 참겠다고 한 걸 후회했다.

5시 40분, 담당의가 와서 내진하고 초음파를 봤다. 어떻게 4센티까지 열렸네요, 아기 머리 방향도 나쁘지 않네요. 우선 무통 맞으면서 기다려볼게요. 그리고 무통 천국 속에서 잠에 빠져들었다.


6시 30분, 이상하게 추워 덜덜 떨며 깼다. 무통 부작용으로 온몸이 간질간질했다. 남편이 저녁을 먹고 오겠대서 다녀오라고 막 보낸 참이었다. 고민하다 간호사를 불러 방 온도를 높였는데 계속 몸이 떨렸다.

7시 30분, 내진을 해보니 아직도 4센티, 이렇게 진행이 안 되면 내일까지 기다려도 큰 의미가 없다고 했다. 난 좀 더 기다려보고 싶기도 했는데, 남편이 수술을 하자며 동의서에 사인을 하러 나갔다. 촉진제도, 무통 약도 다 빼내고 나니 수축이 하나도 없어 아프지도 않았다. 진통을 더 기다린 건 후회되지 않았지만, 자연분만을 못한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8시 20분, 수술실로 들어가며 기어코 풀코스로 다 경험하는구나 생각했다. 마취약을 넣으니 감각이 무뎌졌지만 아예 아무 느낌도 없는 건 아니었다. 돌연 겁이 나 아가를 못 봐도 괜찮으니 그냥 재워달라고 했다.



8시 44분, 설이가 세상에 나왔다. 눈이 오는 날 만나고 싶다는 철없는 어미의 부름에 응답해주듯, 눈이 펑펑 오던 날 나온 우리 아가. 예정일을 거의 다 채워서인지 아기는 포동포동 뽀얗고 머리카락도 많았다. 물론 나는 수면마취를 한 덕에 아가를 본 기억은 전혀 없지만, 사진과 동영상 속 아가가 그랬다.


그리고 머리 정수리에는 산도에 끼인 흔적이 있었다. 아, 너도 노력했구나. 고맙고 미안했다. 역아도 돌고 머리도 많이 안 컸으면서, 자궁 문도 다 열렸는데 왜 나와주지 않았어 하고 배에 대고 속삭였었는데, 알고 보니 아이도 최선을 다한 거였다. 담당의 말대로, 좁은 골반 입구가 문제였다.


결국 응급 제왕을 했음에도, 사실 유도하고 진통을 겪은 건 그다지 후회가 되지 않았었다. 내 성격에 안 해봤다면 또 두고두고 아쉬워했을 게 뻔했다. 그런데, 아이 머리에 산도 자국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처음으로 후회가 됐다. 내 욕심에 아가를 힘들게 한 거 같아 미안함이 물 믿듯이 몰려왔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9시 40분, 수면 마취에서 깼는데 너무 목이 말랐다. 침도 나오지 않아 입안이 까슬거렸다. 새벽 4시까지 마시면 안 된다는 말에 조금 아득해졌다. 수술 전부터 그러더니 여전히 온몸이 벌벌 떨려 혈압을 못 잴 정도였다. 수면마취 때문에 모든 감각이 몽롱했다.

10시 40분, 드디어 정신이 좀 들어 답장도 하고 연락도 돌렸다. 남편이 우리 아이가 너무 예쁘다며, 간호사들도 제일 예쁘다고 했다며 주책을 부렸다. 아직 아가 실물을 못 봐서인가, 난 예쁜 건지 모르겠다고 하니 남편은 어찌 그리 덤덤하냐 했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조금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 닮았다는데 내 눈엔 할머니를 닮은 거 같았다.


그러고 12시쯤 잠이 들었다. 잊기 어려울, 길고 긴 하루였다. 눈과 함께 온 우리 아가, 설이야, 건강하고 무사하게 세상에 나와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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