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왜 프랑스는 낭만적일까?

낭만이라는 행복은 내 마음에 달려 있어.


나는 베르사유에 살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은 참 낭만적이고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한다. 한국인이든, 프랑스인이든 참 많은 사람들이 내가 베르사유 골목골목 발견하는 장소들과 이벤트들을 보며 감탄한다. 연간 7천만 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오는 베르사유이지만, 놀랍도록 베르사유를 와 본 사람들의 기억은 베르사유 궁전과 정원이 정말 커서 다리가  아파서 정원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요..


그런 경험이 가득한 사람들에게 혹은 보지 못한 사람도 베르사유를 보여주면, 정말 베르사유에 아니 프랑스에 이런 데가 있나요? 하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속이 뻥 뚫리네요. 정말 왜 그런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15구 일상 속의 에펠타워

문득 그 모습은 프랑스 하면 파리의 에펠탑, 개선문, 노트르담, 몽마르트르 하는 유명한 장소들만 기억하는 여느 관광객들과 다르지 않다. 아마도 시간도 돈도 제한된 환경 안에서 프랑스를 가장 상징하는 것들은 반드시 보고 가야 한다는 보상 심리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을 그대로 가져와보면, 사실 지구상의 어느 나라나 도시를 가도 사람들은 비슷한 양상을 띤다. 기대하는 것과 실제로 원하는 것을 보는 것에는 참 많은 차이가 있다. Insta vs. Reality처럼.


이렇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가 나는 것은 마치 이력서와 닮아있다. 이력서에는 나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다고 (믿어지는) 학교 경력, 직장 경력, 자격증, 언어 실력 등 많은 요소들이 있지만, 사실 그 안에는 그 사람의 말투, 행동 양식, 취향, 분위기 등 많은 부분이 배제되어 있다. 파리가 그렇게 낭만적이라던데 하고 지하철을 타니 풍겨오는 악취와 수많은 소매치기들. 살아보니 답답하기 끝이 없는 행정 절차 등. 파리라는 녀석의 이력을 보고 온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파리 면면을 발견한다. 물론 해가 지고서야 노란 조명으로 거리거리 역사가 담긴 건물을 비추며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그런 파리도 말이다.


노을지는 베르사유 공원 운하

그럼, 어떤 도시가, 아니 어떤 대상이 좋고 나쁘다고 판단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국 내 마음이다. 내가 그 대상을 사랑하겠다는 마음. 베르사유가 특별히 다른 도시보다 월등히 잘 나서 이 도시가 낭만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자연과 역사, 그리고 아늑함과 활발함이 적당히 어울리는 곳. 그게 내 마음의 결과 맞는 도시이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찾아 이게 너무 좋다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그 모습이 참 낭만적이라고 한다.


사랑과 똑같다. 남들 눈에는 어떤 사람일지언정, 내가 사랑한다고 (믿는) 사람이면 그 사람의 눈빛, 웃음, 향기, 목소리, 그 모든 구석구석이 하나하나 다른 모습으로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이해하고 아끼게 된다. 분명히 같은 사람이었는데, 내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면, 똑같았던 그 모습들이 하나하나 다른 이유들로 싫어지고 피하고 싶게 된다. 파리에 꿈과 기대를 품은 사람도 막상 파리의 소매치기와 불친절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고 나면 사실 파리는 변한 적이 없는데 파리 정말 최악이었어하며 이별한 전 애인처럼 증오한다.


매번 삶의 단순한 이치이지만 내 마음먹기에 따라, 내가 사는 곳, 내가 다니는 직장, 내가 함께하는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나 자신까지, 나에게 낭만이 될 수도, 고통이 될 수도 있다. 프랑스가 낭만적이라고 느끼는 것은, 내가 순간순간 가지는 감정들이 그 어떤 색깔이든 그렇다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픔도, 기쁨도, 사랑하는 것이라면 나에게는 낭만이 된다.


한국에서는 다들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사회적 시선, 압력, 책임감 등으로 감정에 솔직하고 또 남에게 표현하는 것이 선을 넘거나 철이 없거나 도리가 아니라며 꾹꾹 눌러 담아야 했던 경험이 많다. 나뿐만 아니라 내 친구들도 부모님 세대들도 그랬고, 유독 그래서 빨리 취해야만 하는 소주병 이후에서 나오는 취중 진담, 말하지 못하는 답답함을 대신 말해주는 담배 연기 속에 진심을 그저 간접적으로 담아낼 뿐인데, 나는 그게 참 답답하고 힘들었다.


낭만적이었던 순간의 에펠타워

반면 프랑스에서는 당황스럽게도 사람들이 참 감정에 솔직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변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아 그냥 얘가 화가 났네. 거기에 다른 계산을 하고 어떡하지 내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화났어? 나도 이거 때문에 속상해. 나는 어떻게 이해받아야 해? 하면 아 그래 내가 잘못했네 하고 서로 풀고.


그런 뭔가 표현하기 힘든 자연스러움 속에서 내가 나다울 수 있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는 것이 행복했고, 그 인간적인 모습이 낭만적이었다. 다 부서져가는 몇 백 년 된 건물을 불편해고 아직도 고쳐 쓰고, 헤밍웨이 소설에도 나오는 그 예전 거리의 이름이 지금도 파리 길거리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 아마 자본주의처럼 다 갈아엎고 모든 게 새로 설치되고 깨끗한 파리의 거리? 상상이 될까?


자연의 모습처럼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파리가 어느 도시보다 낭만적이라고 느낀 이유인 것 같다.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돈을 벌고 성공하려는 그 모든 이유도 결국은 내 가족,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조금 더 안전하고 편하게 좋은 것들을 누리고 싶기 때문 아닌가? 아바타 영화 속 장면들처럼 우리 모두 자연의 그 순수한 모습, 사랑 앞에서는 누구나 빗장을 풀어헤치고 눈물 흘리고 감동받게 된다. 그것이 평생 인류가 성장해도 변하지 않을 모습이니까.


프랑스가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이 한국의 강원도 양양이라도, 대도시의 관악구라도, 대구의 율하동이라도. 가족과 자연 속에서 우리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면, 그 어떤 장소든 가장 낭만적으로 변할 것이다. 거기서부터 내가 숨 쉬는 한 순간순간들은 모두 낭만이 될 테니, 지금 내게 있는 것에 더욱더 감사하고, 한 번 더 바라보아주고, 너무나 빠르게 지나 사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안아주면 좋겠다.


만일 우리 인생이 단지 5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 모두는 공중전화박스로 달려가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화할 것이다. 그리고는 더듬거리며 그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크리스토퍼 몰리
매거진의 이전글 실은 공존하고 있지만, 결코 같이 할 수 없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