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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Oct 26. 2023

님의 침묵 Original

한용운 시집 초판본

1926년 5월 20일 발행된 한용운 시인의 《님의 沈默》. 그해 12월 25일에는 일본의 123대 국왕 요시히토(嘉仁)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요시히토는 일본 국왕 중 가장 무능했던 군주 중 한 사람이라고도 한다.)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은 1879년에 태어나 1944년 6월 29일 64세에 눈을 감았으니 조국의 광복을 1년 앞두고 사망한 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시인이 그토록 그리던 ‘님’이 혹 조국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그가 자신의 시집 《님의 沈默》의 서문에서 ‘해 저문 벌판’에서 시를 썼다고 밝힌 것을 보면 서산 너머로 진 것은 분명 조국이 틀림없을 터이다.    


  

군  말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라.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긔루어서’ 이 시를 쓴다.      


    저  자     



이 서문에 등장하는 ‘긔룬’과 ‘긔루어서’에 대해서는 수많은 학설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간단하게 ‘그리워서’로 해석하기로 한다. 그리고 ‘마시니’는 1830년대 이탈리아 혁명가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 1805~72)를 말하는 것 같다.

    또한 이 글은 한용운의 시에 대해 분석하거나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에 대한 숱한 글과 논문과 학설이 넘치도록 나와 있는데, 여기에 문학에 대해 문외한인 필자가 어찌 나무 숟가락인들 얹을 수 있겠는가. 단지 《님의 沈默》의 초판본을 소개해 보려 하는 것이니, 큰 기대는 하지 마시고 그러려니 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이 시집은 위에서 밝힌 대로 1926년에 발행되었다. 그때가 일본 국왕의 연호를 딴 대정(大正) 15년 5월 20일이라고 한다. 정가는 1원 50전. 여기에 우편으로 배송되면 16전이 추가된다. 그리고 판권 위쪽에는 ‘복제불허(複製不許)’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또한 판권 앞면에 ‘독자에게’라는 글을 실어 자신을 시인으로 나타내는 것이 부끄럽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앞에서 소개한 ‘군말’은 붉은색으로 인쇄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이 시집 전체를 대변하기 위한 의도 같다.      


    독자에게


    독자여, 나는 시인으로 여러분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시를 읽을 때에 나를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줄을 압니다.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 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는 것과 같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깊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악산의 무거운 그림자는 엷어갑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집니다     


    (을유년 8월 29일 밤)



판권 포함 174쪽의 이 시집에는 88수의 시가 실려 있다. 그리고 속표지와 ‘군말’ 부분은 붉은색으로 인쇄되어 있다. 이 시집은 한용운이 1919년 기미독립선언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이후 3년간 복역한 뒤 출소하여, 1925년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시작(詩作)을 하고 1926년 간행된 것이다. 그리고 1934년에 재판이 발행되었으나, 초판과 재판 모두 일제의 탄압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가 광복 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안타깝게도 한용운이 이미 타계한 이후였다.

    여기에 이 시집에 수록된 시 중 제일 마지막 작품 ‘사랑의 끝판’을 소개한다. (첫 작품은 ‘님의 침묵’.)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

    에그 등불을 켜려다가 초를 거꾸로 꽂았습니다그려

    저를 어쩌나 저 사람들이 숭보겠네

    님이여 나는 이렇게 바쁩니다

    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에그 저것 좀 보아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하시네

    내가 님의 꾸지람을 듣기로 무엇이 싫겠습니까

    다만 님의 거문고 줄이 완급(緩急)을 잃을까 접허합니다


    님이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릅나무 그늘을 지워버리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새는 빛입니다

    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네 네 가요 이제 곧 가요     



[참고 1] ‘접허하다’는 옛 말투로 ‘저퍼하다’, 즉 ‘두려워하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참고 2] 조선조 문신인 정재(靜齋) 이담명(李聃明, 1646~1701)의 연시조 중 ‘사노친곡(思老親曲)’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그 시조 중에 ‘저퍼’라는 단어가 나온다.


    길히 머다하다나면 아니 가라터냐

    말이 파려하다탐면 아니 녜라터냐

    가고녠후(後)면 노모(老母)귀녕(歸寧)할일이대 천진우위(遷臻于衛)언마난불하유해(不瑕有害)라 이를 ‘저퍼’하노라     

    (이 시조에서 종장이 유난히 긴 점이 특이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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