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발령받았던 첫 팀은 소위 말해 '매우 잘 나가는' 부서였다. 바쁨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특별한 업무보고나 회의 이외에 스몰토크가 전무한 엄근진 부서였는데, 12월의 문턱에 접어들자 묘하게 들뜬 분위기가 느껴져 의아했다. 잦아지는 회식, 늘어나는 담배 타임 등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햇병아리 신입의 눈에 비친 으른들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아이마냥 초조해 보이기도, 기대에 가득 차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보낸 겨울의 정점에 우리 팀은 세명의 승진자를 배출해내는 (전무후무한) 기염을 토했다. 승진자가 발표 나던 그 날은 '몇십 년 만에 찾아온 한파'라는 진부한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추웠는데, 우리 팀은 얼어붙은 한파를 다 녹여버리기라도 할 태세로 열정적인 축하파티를 벌이며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얻어먹은 최상급 꽃등심과 화수분 같았던 소주병들이 내게 승진이 의미하는 첫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근 7년간 매해 부지런히도 승진의 계절을 맞았다. 그러나 그 계절을 보내는 방식이 매번 첫 해와 같진 않았다. 다섯 번의 부서 이동을 하는 동안 내가 소속된 부서가 그 계절을 보내는 색깔은 제각기 달랐다. 승진이라는 제도가 누군가 웃으며 축하파티를 벌이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처참한 얼굴로 위로의 술잔을 기울여야 하는 제로썸 게임에 가깝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 것은 그 이듬해가 되서였다. 비(非) 승진자는 팀원들에게 (죄목 없이) 미안해했고, 팀원들은 그에게 해줄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해 술잔만 함께 들이켰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선배를 바라보며 문득 승진제도의 잔인함은 모두를 만족시키는 결과값을 가질 수 없다는 (태생적인)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그에게 왜 그러한 결과값이 도출되었는지 논리적인 설명을 해줄 수 없는 데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팀장님은 '열심히'는 누구나 하는 것이라고, '잘'해야 한다며 질책인지 위로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던지셨다. 다시 찾아온 승진의 계절, 이제는 위로의 말을 준비하기보단 위로의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후보자에 가까워진 나는 진심으로 궁금하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잘해야 하는지를. 승진의 성공 방정식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 실력과 성과는 실패하지 않는 승진 공식?
회사마다 업종과 특성에 맞게 각기 다른 승진 제도를 갖추고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승진자에게 부여되는 인센티브나, 요구하는 기본적 자질들은 대동소이할 것이다. 승진자에게는 높은 연봉과 함께 한층 더 무거운 책임과 권한이 부여되며, 조직 내에서의 역할이 수직적으로 한 단계 상승하는 만큼 뛰어난 업무처리능력, 리더십, 피플 매니징 스킬 등 다방면의 역량이 요구된다.
승진 대상자 개인의 능력과 실력은 승진 공식의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업무 성과가 계량적으로 뛰어나다던가, 회사 발전에 기여도가 높은 업적 등을 쌓은 후보자는 단연 월등한 경쟁력을 가진다. 또한 회계, 법, 계약 등 자신만의 전문 분야가 확실한 케이스 역시 차후 능력 발휘에 대한 기대 가능성을 높여줌으로써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외에도 인사, 감사, 주요 사업 등 핵심 보직이라 불리는 곳에서 커리어 패스를 쌓아온 이력, 평가자로 들어갈 수 있는 임원들로부터 받는 두터운 신망 등은 (이견 없는) 승진 공식 요소라 볼 수 있겠다.
# 그러나, 이변은 늘 존재한다.
본격적인 승진 철이 되면 해당 연도 승진 대상자 명단과 승진 가능 인원이 공지된고, 이어서 구성원들의 (합리적인) 추론이 이어진다. 이때, 앞서 말한 요건들을 갖춘 실력자들은 우선적으로 이름이 거론되기 마련이고, 대게 구성원들이 추측하는 후보자들이 겹쳐지며 당해연도 승진자의 윤곽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러한 집단지성(?)에도 불구하고) 늘 이변은 존재했다. 인트라넷에 게시된 승진자 명단을 다 함께 훑어보며 고개를 연신 끄덕이다 갑자기 정적이 흐르며 "어? 왜 저분이 왜.....(되었지? 혹은 되지 않았지?)"라는 소리 없는 물음이 매해 뒤따랐다. 대다수의 조직원들이 확신을 갖는 유력 후보자들조차 발표 나는 당일까지 손에 땀을 쥐는 레이스를 펼치고 초조해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승진은 명단이 공개되는 그 순간까지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 '프로일잘러'와 '프로존중러'
일명 '프로일잘러' 사업처 A 선배는 모두를 의아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관행적인 업무처리 등으로 공사가 늘 최하위 평가를 받던 부문에서 우수등급이라는 비약적 성과를 이뤄낸 것은 전적으로 A선배의 노력과 역량 덕이었다. 그는 법률 전공으로 관련 법규 및 계약서 등을 재해석하여 카운터 파트의 협의를 이끌어냈고, 업무 혁신을 통해 계량적 성과를 이끌어냈다. 이어서 그 성과가 대외 평가로도 이어지게 하는 등 눈에 띄는 기여도를 보여 전사에 널리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모두가 당해의 유력 후보자로 꼽던 그는 본선에도 이르지 못하는 이변의 주인공으로 남았다. 월등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속 부처의 다면평가를 저조하게 받아 승진대열에 오르지 못했다.
반면 기획처 '프로존중러' B 선배는 동기들 중에 가장 먼저 승진자 대열에 들어섰다. S대를 나온 그는 깔끔한 업무처리 능력과 회계라는 자신만의 전문분야가 명확한 사람이었으나, 당해연도 두드러지는 성과를 낸 사례가 없었다. 게다가 묵묵하고 다소 내성적인 성격 탓에 윗선에 의전을 잘한다던가, 술자리를 통해 너른 인맥을 쌓아왔다던가 하는 특별한 기대 요건들조차 없었기에 그리 큰 주목을 받진 못했다. 그러나 그는 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첫 해에 (단박에) 승진을 하며 이변을 자아냈다
# 결국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
B선배와 같은 부서에서 업무를 해본 이력이 있는 나는 그의 승진을 단순한 운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내가 함께 일을 하며 존경할 점이 많은 선배라고 생각한 (직장생활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분이었다. 나이로나 직급으로나 한참 어린 내게도 언제나 경어를 쓰는 등 한결같이 예의있는 모습을 보여주셨고, 덕분에 그분과 일을 할 때면 늘 존중받는 느낌이 들었다. 부족한 의견을 내더라도 살을 보태 의미있는 방향으로 이끌고, 선임으로써 책임있는 자세를 늘 보여주셨다. 그의 애티튜드를 옆에서 쭈욱 지켜본 나로서는, 그가 내게만 이런 존경과 신임을 얻었을 리 없다 확신한다. 그는 나를 비롯한 수많은 조직 구성원들의 마음을 (조용히) 얻었을 테고 그것이 곧 평가로 이어져 동기중 첫 승진을 끊은 이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승진도 결국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본인이 현재보다 상위 직위에서 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입증하고 설득시키는 것이 승진 전쟁의 요지라 할 수 있다. 이때 입증과 설득의 대상은 바로 사람이다. 승진의 자격을 판별할 때, 조직원 중 누군가는 업무의 결과라 할 수 있는 업적과 성과에 중점을 둘 테지만 다른 누군가는 업무 처리 과정 속 그 사람의 모습을 관찰한다. 부서 간 협조를 요청하는 자세를 보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대화의 기술을 듣고, 하급자를 이끄는 리더쉽과 상급자에 대한 팔로워쉽을 보며 해당 직위에 적합한 자인지 가늠해보고 그것을 평가에 반영하는 것이다.
# AI가 승진후보자를 평가한다면 공정한가
'프로일잘러' 선배가 다면평가에서 고배를 마신 것을 두고 당시 그의 상사는 개탄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업무 성과가 훌륭한 사람이 고작 부서에서 평가 좀 낮게 받았다고 본선 진출조차 못하는 이 작금의 시스템이 말이 되는지 모르겠다며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높였다. (상사 피셜 :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정성평가가 그의 승진을 뒤집은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였다.
그렇다면 AI가 승진 후보자를 평가한다면 그것은 공정할까. AI는 빅데이터를 분석한 자료를 근거로 후보자 별 근무기간 내 회사의 발전에 기여한 정도를 수치화해서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외모, 목소리, 인상 등 사람들의 선입견이 반영될 수 있는 요소를 사전 차단하여 객관적 평가를 도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제해결력, 리더십, 협상력 등의 정성적 요소를 AI가 제대로 판별할 수 있을까? 대상자의 대답, 언어 표현, 제스처 등을 분석하고 그것을 근거로 판단했다 하더라도 그 결과값을 논리적으로 완벽히 설명해내는 것은 여전히 불가할 것이다. 하물며 AI가 파악한 후보자의 피플 매니징 능력,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 등을 우리가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지 또한 의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뽑힌 승진자가 함께 근무하고 지휘 감독할 대상은 컴퓨터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점에 있다.
승진 제도 자체는 공정할 수 있다지만, 승진 자격을 판단하는 평가자들의 근거 회로는 모두가 동일할 수도, 따라서 모두에게 공정한 기준이라 인정받을 수도 없다.
# 승진에는 공식이 없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성평가가 반영될 수밖에 없는 공사의 승진의 구조*상, 결과적으로 승진한 사람만이 답을 갖는다. 평가에서 떨어진 자에게 탈락한 이유나 인과관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도, 또 그렇게 해줄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쩌면 이 구역의 승진에 있어서 정석 공식 따윈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과관계가 복잡다단한 승진 방정식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다면평가(상사/동료/하위평가)로 이루어지며 업무능력, 문제 해결력, 협상력, 창의력, 리더십 등의 항목 등이 존재한다.)
개인의 역량과 실력을 높이고, 그리고 그것이 업무성과로, 회사의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조직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노력하는 일은 지속되어야 한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때 업무의 결과만큼이나 그 과정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결과물을 이끌어내기까지 해당 후보자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면모는 사람들의 (비공식적) 승진 자격 판단의 근거가 될 테니 말이다.
'열심히' 해서는 안된다고, '잘'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의미를 반복하여 생각해본다. 누구나 한다는 '열심히'의 의미는 능력을 갖추고 성과를 내는 일, 그 성과를 널리 공유하여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일 등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승진 대상자라면 응당 그 정도는 누구나 갖춰야 하는 기본 요소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잘'하라는 것은 왜 본인이 승진자가 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나에게도, 다른 조직 구성원 등에게도 '잘' 납득시켜야 한다는 뜻이라 해석해 본다.
승진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승진 이후의 삶이다. 그렇기에 승진은 끝이 아닌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말하지만 나는 자격 있는 사람이 그 자리를 오르는 것이 맞다고 믿는다. 승진을 해야만 하는 자신만의 이유를 명확히 하는 것, 왜 본인이 해당 직위에 어울리는 사람인지를 업무자세로써, 그리고 결과로써 증명해 내는 것, 그 과정 속에서 모두가 자신만의 승진 공식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주관식 인생에서 정답이 없는 것은 비단 승진뿐은 아니다. 이제는 내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승진이라는 제도, 나 스스로를, 그리고 다른 조직 구성원들을 설득시킬 나만의 답안을 구성할 준비를 해야 할 한 해다. 빠르든 늦든 '열심히' 그리고 동시에 '잘' , 나답게 준비해보자 다짐해본다.